앞서 요리의 '이름'을 다룬 글에서 막상 가장 논란이 된 이름은 다루지 못했다. 바로 에드워드 리의 '참치 비빔밥'(제10화)이다.* 자신의 인생을 단 하나의 요리에 담아내는 '인생을 요리하라' 라운드에 등장하여 두 심사위원의 상반된 평가로 눈길을 끌었던 요리이다. '참치 비빔밥'은 단순히 '이름'에 대한 논란을 넘어,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를 정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에드워드 리는 '참치 비빔밥'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비빔 인간'이라 말하며 미국인으로서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요리할 때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한 맛(한 가지 맛)'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았다고 소개한 '참치 비빔밥'은 밥 위에 비빔밥 재료를 모두 얹어 둥글게 만들어 튀긴 다음 생참치로 감싼 요리이다.
안성재 심사위원의 첫 질문은 "그러면 이걸 비벼서 먹나요?"였다. 잘라서 먹으면 된다는 대답에 "비빔이 없으면 비빔밥이 아니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에드워드리는 "저만의 비빔밥"이라고 답했다. 이 요리에 백종원 심사위원은 97점, 안성재 심사위원은 82점을 부여해 무려 15점 차이가 났다. '인생을 요리하라' 라운드에서 가장 큰 점수 차이였다. 안성재 심사위원은 맛에 대한 점수 차이가 아니라 관점에 따른 점수 차이임을 밝히며, 비빔밥이라는 한국 대표 음식을 칼로 잘라먹는 것은 음식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이 비빔밥 논쟁은 장외로 번졌고, 첫 라운드에 출연했던 '비빔대왕'이 에드워드 리의 비빔밥은 비빔밥이 맞다고 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나는 '비빔대왕'의 판결을 수용하지 못하겠다. '비빔밥'이 들어간 요리이름은 사실 앞서 다룬 어떤 이름 유형에도 포함되지 않는 특수성을 지닌다. 바로 '비빔'이라는 단어가 지닌 수행성(performativity) 때문이다. 한국은 식탁에 불판을 두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경우가 흔한데도, 요리 이름 자체에 먹는 사람의 수행성을 지시하는 사례는 내가 아는 한 '비빔밥'이 유일하다. 비빔밥은 먹는 사람이 '직접 비빈다'는 특수한 취식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요리다. 덕분에 다른 요리와 달리 재료들을 가장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고추장의 양도 입맛에 맞춰 조절하도록 따로 종지에 담겨 나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비빔이 없다면 비빔밥이 아니'라는 안성재 심사위원의 반문은 비빔밥의 수행성을 겨냥한 정확한 지적이다.
안성재 심사위원은 이에 더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비빔이 없는 비빔밥에도 '비빔밥'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그게 이름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 언어학의 초석을 놓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생각(pensée) 그 자체는 하나의 성운(星雲)과 같아서 그 속에 필연적으로 구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 언어는 청각 이미지(image acoustique)인 기표와 그에 대응하는 개념(concept)인 기의가 자의적(arbitraire)이고 무연적(無緣的, immotivé)으로 결합된 것으로서, '아무것도 필연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생각을 분절적으로 표상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빔밥'에 필연적으로 '비빔'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의 공시성(共時性) 또한 얘기한다. 언어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언어 공동체, 즉 언중(言衆)의 사회적 약속에 근거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체계를 이룬다. 물론 기표와 기의가 서로 자의적인 관계에 있는 만큼, 시간이 흐르고 언중의 사용법이 바뀌며 언어가 달라질 수는 있겠다. 그러나 어느 요리사, 어느 비빔밥 전문가가 비빔밥에 '비빔'이 없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단어의 뜻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쩌면 '참치 비빔밥' 그 자체보다도, 비빔밥 논쟁을 통해 에드워드 리가 한국 요리에 대해 드러낸 남다른 관점과 담대한/위태로운 해석이 오히려 에드워드 리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요리사와 음식의 '정체성'은 자신의 시그니처 요리를 선보이는 첫 번째 라운드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한 단어이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등) 분야의 요리사들이 다양하게 포진하며 요리를 선보인 데다,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거나 유학했던 요리사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안성재 심사위원 본인이 10대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 간 재미교포로서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만큼, 그 자리에 오기까지 정체성에 대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안성재 심사위원은 요리에서 '정체성'의 대척점에 '작위성(作爲性)'을 두는 듯하다.
안성재 심사위원은 '본업도 잘하는 남자'(제3화)가 재미교포로서 멕시코, 한국, 유럽 요리의 요소를 섞어서 만든 'MY LALALAND soul dish'에 대해 재료를 섞는다고 정체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일갈한다.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인데, 정체성을 위해 억지스럽게 맛을 섞은 정도에 지나지 않다는 평가다. <흑백요리사>에 '작위성'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안성재 심사위원이 뚜렷한 관점이 부재한 상태에서 과잉된 제스처를 담은 음식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파이널 라운드 진출자를 가리는 '인생을 요리하라' 미션의 심사 기준에 대해서도, 안성재 심사위원은 '오버스러운 스토리'는 역효과가 날 수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제10화). 요리가 맛에 앞서 요리 이외의 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예술성과 작위성 사이의 줄타기는 선전(宣傳, Propaganda) 예술에서 드물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인 <평화를 위한 투쟁(Fighting for Peace)>에서 휘날리는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군중의 모습은 예술성을 압도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기세등등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All art is propaganda)"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말에도 동의하지 못하겠다. 어떤 예술은 프로파간다를 넘어선다. 이때 예술은 그냥 존재다.
*자막은 '참치 비빔밥'으로 나갔지만, 에드워드리는 '현대식 참치 캐비아 비빔밥'이라고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영어 자막은 'Modern-style tuna, caviar bibimbab'으로 번역됐다. 에드워드 리가 말한 이름에는 '현대식'이라는 본인의 재해석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누락된 것은 비빔밥 논쟁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한 면이 있어 보인다.
**출처: https://imnews.imbc.com/news/2024/enter/article/6644439_36473.html
***에드워드 리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여 '비빔밥'을 '주먹밥'으로 정정하겠다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주먹밥'은 만드는 방식과 문화적 맥락이 '비빔밥'과 현저하게 달라져버리므로 '인생을 요리하라'의 미션과 동떨어진 결과를 낳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