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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Nov 01. 2024

시작 그리고 과정의 의미

작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심리학 학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었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심리학 공부에서 학위 취득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학점은행제를 통한 학위 과정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였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수년 동안 하다가 뒤늦게 미국 유학을 떠나 전자공학 박사 학위 공부를 마친 것이 2002년이니 20여 년 만에 다시 형식을 갖추어 전혀 다른 영역의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새로운 배움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독일에서 8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의 본사에서 독일 주재 근무 인사 발령이 났을 때, 보통의 해외 주재 근무가 그렇듯 길어야 4년을 예상했었다. 당시 근무했던 회사는 글로벌 사업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던 상황이라 인사이동이 빈번했고 해외 주재 근무 인원들도 기본 임기인 4년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도 그리 오래 머무를 것 같지 않은 생각에 가족 없이 단신 부임으로 결정했다. 독일은 나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나라였다. 대학원 유학을 했던 미국은 어릴 적 친구가 이민을 가서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했고,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언젠가 유학을 가게 된다면 미국이 될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이 있었기에 심리적으로 이미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나와 가깝게 일할 독일 직원들과는 영어로 근무가 가능했기에 독일어 공부 필요성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1~2년 근무하면 다시 한국 본사로 돌아갈 생각에 조금 불편해도 그냥 영어만으로 살아 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미지의 독일 생활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면서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새로운 시작으로 다가온다. 의도한 시작도 있지만, 의도치 않은 시작도 많다. 

의도하고 기대한 시작은 목적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 시작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 예상을 해 볼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시작의 목적을 떠올리면 속도 조절이 필요할지언정 방향을 잃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심리학 공부가 그러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나 자신 알기’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고,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철학 서적과 심리학 관련 도서를 틈틈이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두서없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많은 말과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늦게나마 찾은 그 무언가는 심리학 공부였다. 학위 자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학위를 목적으로 구성된 체계적인 학습 과정이라 나의 기대에 잘 맞을 것 같았다. 일부 과목은 나의 관심 밖 주제여서 흥미를 가지기 쉽지 않았지만, 그 과목들도 심리학에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과목을 모두 이수하고 나니 각각의 과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심이 적었던 과목들을 소홀히 대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전체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보인다는 말과 같은 이치란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은 시작이란 어떤 것일까?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닐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 사업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기업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은 회사 내부의 변화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조직과 사람이 바뀌고, 구성원들이 새로 조직되며 직원들의 업무 목표가 조정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구성원들에게 의도치 않은 시작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업무로의 변경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근무 환경이나 새로운 업무 능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회사가 정해놓은 무언가를 시작하도록 만드는 압력이 되기도 한다. 나의 의도나 선택은 아니지만 회사를 떠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시작인 것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시작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변화에 대한 일반적 저항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 새로운 시작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 새로운 경쟁에서 뒤처지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 등이 뒤섞인다. 이러한 불안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잦아들기도 하고, 반대로 더 증폭되기도 한다. 의도치 않은 시작이지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긍정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처음의 불안은 사라지고 재미와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직면시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을 돕는 자기계발의 노력이 또한 필요할 것이다. 나의 독일 주재 근무가 그러했다. 나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던 독일 근무 발령은 커다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수 백명의 독일 임직원들과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한국의 가족을 떠나 낯선 독일의 소도시에서 혼자서 얼마나 오래 그리고 무사하게 생활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환경은 낯설지만 일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더불어 철학과 예술의 나라 독일에서 몇 년 살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단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어서면서 처음의 불안감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불안했던 상황을 막상 닥치니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자신을 볼 수 있었고, 작은 성취 과정이 쌓여 새로운 자신감을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처음 예상과는 달리 무려 8년 동안 독일에서 일하고 생활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았던 시작이었지만,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과정의 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의도한 시작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기대와 다를 수 있다. 모든 일이 항상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정이 인내로만 채워지고 결과만을 중요시한다면, 어떤 시작의 실패는 쓰라리고 공허하기만 할 것이다.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정의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비록 기대한 결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스럽지 않을 수 있다.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깨우침이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동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사에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나 만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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