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통의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쉴만한 물가 Nov 22. 2024

보람엄마 탈출기

딸둘맘에서 쉴만한물가로

자녀이름으로 산지 어언 10년. 

내 이름 석자보다는 보람엄마라는 수식이 편했다.

"보람엄마야~ 보람엄마야!" 

시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반모임에서 만난 엄마들도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언젠가 '말의 힘'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다.

언어는 힘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로버트 콜리어

말과 언어가 단순히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쯧쯧쯧, 네가 그렇지 뭐" 

어릴 때 부모에게 들었던 부정의 말들이 자신을 정립한다는 듯,

부정적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생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남편까지도 나를 보람엄마로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는 내 이름에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듯 '보람엄마'는 나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보람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친밀한 가면을 씌어주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람 '정지수'의 싹이 틀 수 없도록  '보람엄마'라는 물을 부지런히도 부어주었다. 

그리하여 내 이름답게 보람이에게 무엇을 입힐까, 무엇을 먹일까, 어떻게 키울까를 고민하는 K 엄마가 되어있었다. 

아이가 초등에 입학하고부터는 자녀 양육에서 자녀 교육으로 모든 포커스가 이동했다. 

초등에 입학하는 아이를 잘 키워보고자 정보를 얻기 위해 카페부터 가입했다. 

'앗, 닉네임을 쓰라고?' 제일 처음 생각나는 이름은 보람엄마였다. 

하지만 우리 자녀 세대에선 흔하지도 않은 '보람'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싶지는 않았다. 

'보람'은 누구나 한번 들으면 쉽게 각인되는 이름인데 누군가 나를 알아볼 것 같아 싫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튀지 않으면서 나를 드러내지 않을 가장 적합한 닉네임을 짓기 위해 눈알을 굴리며 머리를 굴려 '보람엄마'를대신할 닉네임을 찾게 되었다. 전국에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은 있을법한 이름이 맘에 든다. 

그 이름은 바로 "딸둘맘"

호호호.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딸둘맘'이란 닉네임 속에 숨어 슬기로운 초등생활 카페에 가입하고 활동하며 자녀교육의 정보를 얻고 소통했다. 

그렇게 '보람엄마'에서  '딸둘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딸둘맘'이란 이름으로 정립된 나에게는 '딸 둘을 어떻게 하면 잘 교육시켜 좋은 대학에 입학시킬 것인가'라는 미션이 부여되었다. 교육에 관심 있는 엄마들이 모여있는 카페라 엄마들의 생각도 결도 비슷한 것 같았다. 

카페지기 이은경 선생님이 초등시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것은 독서였다. 자녀들을 독서하는 아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엄마들이 먼저 책을 펴고 읽으라고 하셨다. 딸둘맘인 나는 두 딸들의 독서교육을 위해 책을 펼 결심을 했다. 집에 나를 위한 책은 없었다. 책 좋아하는 큰 딸을 위해 주 1회씩 도서관에 가서 어린이 도서 28권을 빌려다 둘 뿐이었다. 큰 아이가 추천하는 책들을 시작으로 딸둘맘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여름이 반짝],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등의 초등 아이 추천도서는 근 10여 년간 책을 펴본 적 없는 엄마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그렇게 어린이 소설, 청소년 소설의 재미에 빠져 년간 100여 권을 책을 읽던 해에 카페에서 '엄마 독서모임 멤버'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곤 주어 담을 수 없는 한마디 "저요!"를 던져버렸다. 


pixabay


독서모임에 모인 엄마들의 닉네임은 모두 그녀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매일감사해, 힘내자, 소확행, 봄이 와, 사브라, 나무그늘, 안개상자, 온더웨이, 하랑' 

어쩜 그리도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한 단어를 골랐는지 고심하고 고심해서 지은 내 닉네임 '딸둘맘'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 갈아 치울 결심으로 다른 닉네임을 떠올려봐도 나에겐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페 가입할 때는 미처 몰랐다. 딸둘맘이란 닉네임이 6년이나 나를 따라다닐 줄은.

이름석자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닉네임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딸둘맘'이라는 이름은 그 시절의 나를 반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딸 둘을 키우는 엄마였다. 


보람엄마로 10년, 딸둘맘으로 6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쉴만한 물가'로 살기로 했다. 

읽는 삶을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쓰는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브런치작가와 함께 필명을 고민하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보다가 성경말씀을 떠올랐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 중.

쉴만한 물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쉼이 되고 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나를 쉴만한 물가로 불러줄때, 

말의 힘을 빌어 5년 후 10년 후 '쉴만한 물가'로 정립될 수 있는 삶이 되길 기대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