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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가나 Nov 06. 2024

애미야~ 김장은 하고 갈래?

우리가 없으면 김장을 못하시나요?


이른 저녁을 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오니 남편은 벌써 퇴근을 하고 들어온 모양이다.

“왔어?”

“엇... 어~”

곤란한 말투로 응답하더니 이내 사뭇 진지한 통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애미는 왜 전화를 안 받냐?” 

남편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툭툭한 시어머니의 음성을 피해 화장대에 놓인 전화기를 가만히 터치하니 5분 전, 시어머니 부재중 전화 알림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치로 번쩍인다.

“아니~ 김장을 말이야~ 느이 아버지가 배추가 덜 자랐다고 다섯째 주에 하자고 하는데 시골(친정)에는 언제 하는지, 일정을 바꿨으면 하는데...” (언제 하는지 아시면서 왜 그러실까요...)

“알겠어요~ 일단 아버님께 여쭤보고 연락드릴게요.” (이미 결정된 걸 뭘 여쭤본다고 하는 거지?)

안방까지 새어 들어온 난처한 공기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젖은 머리를 둘러매고 곧장 거실로 나간다.

“에휴.. 우리가 없으면 김장이 안 되나 보다.”

시어머니와 통화를 끝낸 후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남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어수선하기만 하다.




내용은 이렇다.

뭐든 신속하게 결정하시는 시원시원하신 시어머니는 10월부터 김장 스케줄을 잡으셨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달력을 보시고는 신속 정확한 결정을 내리신다. 시어머니는 11월 넷째 주에 하겠다며 빠르게 날짜를 점유하시고 우리 친정 김장은 그날을 피해 그다음 주에 하겠노라 이야기를 다 끝내고서야, 나도 신속히 친정아빠께 전화를 드렸다.

“아빠, 이번 김장은 11월 마지막 주에 하는 게 어때? 넷째 주에 시댁 김장이 있어서...”

“그래~ 그래라.. 너들 편한 시간에 내려온나~ 11월에만 하면 괜찮애.” 

딸내미 눈 밖에 날까 항상 사돈네가 먼저인 아빠의 목소리는 당연하다는 듯 얌전하고 덤덤하다.  

   



그런데 날짜 체크를 몇 번이나 하셨던 장군 같은 시어머니는 어디 가시고 배추 속이 덜 찼다며 우리 친정 김장 하는 날에 해야겠단 말씀만 계속하시는 것이 나는 영 마뜩잖다. 그렇게 당신의 사정만 죽~ 말씀하시고는 머쓱하셨는지 정 안되면 12월로 미루시겠다고 말 끝을 흐리니 효자 아들 마음이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지.. 남편은 항상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자기 부모님이 힘든 건 절대 못 보는 엄마 바보였지..?

장인어른은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씩씩한 시골 할아버지고.. 그럼 당신은 자기네 집으로 가.. 난 친정으로 갈 테니..

어머니도 눈치 보지 마시고 원하는 날짜에 김장하세요. 저는 친정에 갈게요. 저도 친정식구들과 약속을 했잖아요. 어머니 결정에 친정형제들과 맞춰놓은 일정을 또 번복해야 하나요? 그냥 아들과 편하게 김장하세요.'


내 마음의 소리는 꽤 울퉁불퉁한 채로 크고 작은 질문들을 연신 쏟아냈다.


사실 우리가 없어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게 시댁 김장날이다. 시어머니의 동네 지인인 살림 고수 세, 네 분과 시고모님, 거기에 자식들까지 총출동하면 성인만 10명이 넘는다. 빠른 손들 덕분에 두 시간이면 집집마다 챙겨갈 김치통들이 착착 줄을 서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하니 말이다.

어머님이 우리 친정과 날짜가 겹치게 일정을 바꾸셨으면 사돈네 생각해서 '여긴 사람도 많으니 그냥 친정에 다녀와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무리였을까... 12월을 넘겨서라도 우리와 꼭 김장을 해야 하는 시어머니의 속내가 궁금하다.

다른 자식들은 약속 있다고 못 온다 하면 괜찮다 괜찮다 안 해도 된다며 인자한 웃음으로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시어머니시거늘, 이상하게 우리가 일정이 있다고 하면 그 자비로우신 넉넉한 마음은 단단히 꼭 걸어 잠그시고 기어코 날짜를 변경해서라도 김장날 붙박이로 두시려 하니…

남편이 주워 온 자식이거나 내가 효자 아들 뺏아간 미운 며느리 거나...

후... 어찌 됐든 우릴 향한 시어머니의 칼칼한 애정이 커갈수록 김장철 며느리 속은 매콤하게 더 뜨거워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남편의 순진했던 여자친구일 적 나는, 시어머니가 혼자 김장을 하신다는 얘길 듣고 어쩐지 애잔한 연민이 올라와 앞치마를 챙겨 들고서 시댁 입성을 자처했다. 꽤나 열심히 거들고 나니 시어머니는 자취하며 쉽게 먹지 못하는 반질반질 따뜻한 수육 한 접시를 내주셨다. 그리고 김치 한 포기 얻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뿌듯했고, "결혼 전부터 그러지 마... 그럼 결혼하고 나서 엄청 기대하신다."라는 결혼한 선배의 뼈 있는 충고를 들은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해 김장 시즌에 결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의 집이 아닌 시댁에 정식으로 김장을 하러 가는 날이다. 하필 이런 날에 친구 결혼식이 있어 남편은 강원도행 버스를 탔고 나는 그와 반대 방향인 시댁에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갔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새댁은 정육점에 수육용 삼겹살을 둘레둘레 사들고 걸어가며, 남편 따라 쪼르르 나서지 않은 며느리가 얼마나 기특하고 귀여우실까… 내심 시부모님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역시 특별한 리액션이 없어 머쓱한 찰나에, 앞치마를 서둘러 매고 김장 지옥 구덩이에 발을 담갔다.

혹여, 그때 남편을 따라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뒤가 서늘해지는 날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50일이 지날 무렵 또 김장 시즌이 돌아왔다. 바리바리 짐을 싸서 아이와 함께 김장길에 올랐으니 50일 된 아기라도 예외가 없다. 친정에선 회복이 더딘 딸과 손주 생각해 굳이 뭐 하러 오느냐 말리는 바람에 그날 언니와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거리에 사는 아들네를 굳이 불러들이시고 방에서 애기나 보고 있으라는 혜택을 주셨으니 이게 무슨 일이람 어리둥절하며 아이를 안고 들어가는데, 동서까지 우리 방으로 들여보내 세트로 김장 열외를 시켜주셨던, 누군가에게만 공평한 시어머니의 사려 깊음에 할 말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이는 자라고 또 어김없이 김장 때가 되었다. 돌이 지난 아이는 몸이 약해 병원 출입이 잦았고 이번엔 장염으로 일주일이 넘도록 설사를 하는 통에 푹 절여진 배추 마냥 쓰러져 있는 아이를 보니 이번 김장은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일찍부터 시댁에 전화를 걸어 사정 설명을 했지만 변명처럼 들렸을까...?

싸늘해진 시어머니의 반응에 축 늘어진 아이를 차에 태워 수시로 기저귀를 확인해 가며 부리나케 고속도로를 달렸던 때도 있었다.


'나도 이제 삐뚤어질 테다' 마음만 먹었지 어떠한 상황에도 우리는 꼭 달려갔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우리가 없으면 김장이 안되니까....




어제저녁 시어머니의 전화로 여전히 뾰족한 마음이지만 또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친정에 전화를 건다.

“아빠, 시골엔 배추가 어때? 있지.. 시댁 김장을.... 그러니까... 어머님네 배추가 작아서 우리 김장하는 날에

해야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어떡하지? 우리도 그날 해야 되잖아..."

“아~그래..? 에이~ 우리도 배추가 잘아서 12월에 해도 된다. 괜찮애~ 괜찮애~ 사돈네가 그때 하자 그면, 그리해라~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배추 얼면 어떡해..?"

"마당에 포장 덮어놓으면 괜찮애~ 안 얼어."     

후… 김장은 11월에만 하면 된다고 해놓고선 배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또 양보해 주신다.


해마다 김장철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 어찌나 다채롭고 신선한 것들로 추억하게 하는지 참으로 얄궂은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올해도 우리가 없으면 절대! 안 되는 김장을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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