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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관찰자 Nov 09. 2024

나의 이야기

죽음의 시나리오

 "당신은 행복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고 있습니까?" 언뜻 들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원하며 살지, 누가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며 살고 있겠는가? 하고 의문이 드는 말이기도 하고 혹자에 따라서는 반발심까지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나 잘 살고 싶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불행의 시나리오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의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게 되었을 경우, 자신의 의식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에 뿌리내린 마음이 그동안 자신의 삶을 끌고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내 삶이 왜 이렇게 되었지?라고 탓할 수가 없다. 자신이 그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뿌려온 씨앗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그 씨앗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삶은 사람의 깊이 숨어 있는 '진정한 마음'에 응답한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행복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는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삶에 대한 배신감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이다. 바로 나의 얘기다.


 나의 깊은 무의식에는 죽음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우연히 침묵 기도 중에 알게 되었다. 나의 숨어 있던 진짜 마음은 '죽음'이었다. 스치듯 기억해 낸 건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이 세상을 별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마음, 즉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어린 나는 우울했고 클수록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세상의 부조리함과 강압들이 그럴듯한 대의와 선의의 말로 싸여 있다는 것을 어린 나는 감지하고 있었고 나름 저항하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와 호통이었다. 어른들은 한탄과 한숨으로 가득했고 각자의 고통으로 도박, 술, 여자, 욕설, 폭력, 싸움 등이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그런 어른들의 고생 덕분에 자랄 수 있었던 나는 그 은혜를 갚아야 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라도 아버지는 자식들을 혹독하게 대하였다. 성년이 되어 나 자신을 찾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고민하던 차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호기롭게 독립하여 나름 이상들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돌아오는 건 실망과 좌절이었다. 조울증으로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지 못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듯 보였던 그런 삶이 힘들다고 하여 실제로 자살을 계획한 적도 시도한 적도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는 말을 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살면 나 스스로가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행복할 수 있을지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결혼해서 엄마가 되든,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를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아픔과 고통이 죽고 싶은 마음으로  나의 무의식 맨 밑바닥에 자리 잡아 나를 아래로 계속 추락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보통의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나 자신과도 소외되어 있는 고통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어두움들을 감추고자 한동안은 조증으로 높이 날아오르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우울증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삶을 번갈아가며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실질적으로는 고통을 끌어안고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의식적으로 같은 죽음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과 결혼도 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서로에게 반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혼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던 남편은 자신의 성질을 죽여야 하는 사회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아 마음속에 쌓인 신음과 한탄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저녁 식탁에서 술을 마시며 쏟아내었다. 회식도 잘 가지 않았다. 가족들을 돌보는데 책임감이 강한 성격은 좋았으나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에 대한 대한 숨어 있던 불안감이 남편을 압도 집 안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통제하려 했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였다. 결혼 후 가족 중심으로 180도로 바뀐 성격으로 인해 결혼 전 그를 알았던 주변 사람들은 다 의아해할 정도였고 아내인 나도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와서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겉으로 보기에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려주는 지극히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의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작은 일에도 극도로 화를 내며 온갖 심한 말을 어머니에게 퍼부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남편에게서도 수시로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런 부분이 자기 안에 있었는지 남편도 몰랐기에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황했고 깊은 자괴감에 종종 빠지기도 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남편이 폭발할지 몰라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고, 남편에게 불안감을 주는 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잘 대처하고자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한 상태가 되었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고통들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지만 나는 남편과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와 힘든 감정들을 토로하는 미성숙한 어른이 어느새 되어 있었다. 더구나 조울증으로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았기에 아이들에게 순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여 소리 지를 때가 종종 있었고 그때는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몰랐기에 죄책감과 정죄감으로 더욱더 우울해졌다. 남편도 평소에는 자상하지만 어떤 일로 폭발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극단적으로 말과 행동을 할 때가 많아 부모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했던 큰 아이에게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예민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기에 그런 일들이 가슴에 더욱 깊이 박혔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가 마음과 정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극단적인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아빠로서 아이가 아픈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이었지만 가장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 주었다. 정신질환자라고 아내를 홀대한 적도 없었고 아이에게 유전적인 이상을 주었다고 비난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병을 낫게만 할 수 있다면 아내와 아이를 위해 어떤 일이든 배려해 주려 했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려 하였다. 아픈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어떻게 낫게 할 수 있을지 누가 가르쳐 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지만 관련 분야의 책을 읽지도, 상담도 받지는 않았다. 아이와 병원을 알아보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선생님을 찾는 것 등 치료와 관련된 모든 과정은 나의 몫이었다. 결국 엄마인 내가 걸어서 나가는 길을 찾아야 했고 이 일은 삶이 깊은 고통 가운데 내게 준 숙제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행인 건 약물치료가 효과가 있어 약을 먹은 뒤로는 거의 일정한 평정심을 가지고 아이들과 남편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의 흥분도 극도의 우울도 없어진 나의 모습은 왠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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