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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Dec 19. 2024

어느 날 길을 잃었다

무신론적 / 유신론적 실존

어느 날 길을 잃었다. 또는 어느 날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고장 난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이나 방향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십대 초반 철학에 관심이 가고 많이 좋아했다.

길을 잃은 적도 없었고 몸이 고장 나지도 않았으며 마음이 그다지 아플 일도 없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겪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럴만한 경험도 없었으나

어떤 이유가 나를 유독 염세적이고 인간의 부조리를 비난하는 쇼펜하우어나 사르트르 카뮈 같은 음울하면서도 심오한 철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게 하였는지 모른다.


스물 한 살 때였다.

남편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강의로 유명했던 교수님의 미학 수업을 도강하였다. 그 당시에는 도둑 강의가 유행이기도 했다.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두 시간 강의였는데 남편은 강의실에 함께 들어갔다가 이십 분 정도 함께 앉아 있더니 잠깐 급한 일을 보고 올 테니 듣고 있으라며 조용히 뒷문으로 나갔다가 수업이 끝나자 나를 데리러 왔다.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심오한 철학을 별반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깊이 있는 대화나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심하게 피하는 스타일이다.

경제학을 전공해서인지 역시 경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경제나 경영학은 재미가 없고 지루하며 관심이나 흥미가 전혀 안 가서 심하게 거부하는 편에 속한다.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 맞지 않는데 연애 기간은 강산이 한번 변할 만큼 길었고 둘 다 스무살 첫사랑에 성공하여 결혼에 골인해서 자식을 두 명이나 낳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암튼 두 시간의 도강 시간에 만난 인물은 사르트르였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무(無)라는 개념이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절대 자유가 무(無)에서 온다고 보았다.

‘무’의 첫 번째 의미는 사람과 세계 사이에 있는 간격이나 분리 같은 것이었다. ‘무’의 두 번째 의미는 세계 속 대상들의 헛됨, 덧없음, 소멸과 같은 의미를 갖는데, 이 두 가지 의미의 특징을 전자는 인식론적인 의미이고 후자는 정서적 의미라고 한다면, 사르트르는 ‘무’라는 개념을 주로 인식론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 메리 워낙 저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 인용     


사르트르는 만약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 종교적 삶에 경도된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의 기본 가능성인 자유의 선택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무엇보다 현재 인간의 삶, 죽음 직전까지의 인간의 생을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존재는 가능성 앞에서 자유를 느낀다.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주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으며 자유와 주체성의 추구는 실존주의의 전제 요건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실존이란 인간은 고달프지만, 스스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발견하며 사회변혁이나 인간의 개혁원리를 강조한다.

반면에,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란 기독교적 정신에 근거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밝히며 인간존재의 실존을 해명한다.



 언젠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목사님께서 ‘신에 대한 믿음’이란 어떤 ‘확신’에 가깝다기보다는

 ‘진실함’이나 ‘겸손함’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그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교제하면서

 ‘진정한 믿음’이란 확신보다는 겸손함이나 진실함에 가깝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겸손해질 때, 신을 향한 진실한 믿음도 자발적으로우러 나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어느 날 길을 잃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질문을 던져본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주여,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이제 일어나 저희를 안전한 지대에 두소서.

주의 장막에 제가 피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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