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교과서 말고는 변변한 책 한 권 없었다. 그나마 사라호 태풍에 이마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항상 책에 목말라 있었다.
은퇴 후에는 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일이 나의 유일한 낙이다.
주로 아름다운 가게에서 책을 산다. 글쓰기 책과 수필 또는 인문학책이나 소설 시집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책은 바구니에 담는다. 먼저 책을 펼쳐서 표지 앞 뒷면을 훑어본다. 이렇게 고른 책은 대개 열권 남짓 되는데 두세 권 정도는 도로 책장에 꽂아두고 다시 책을 펼쳐 서문과 목차를 읽고 판권을 본다. 판권의 출판 회수가 두 자리가 넘어가면 무조건 산다. 표지나 장정이 예쁘고 중후한 책도 산다. 대개 예닐곱 권은 사 온다.
다음은 황학동에 있는 헌책방이다. 매달 한두 번은 가는데 요즈음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들린다. 책방 주인은 깊숙이 감추어둔 절판된 희귀본이나 초간본을 꺼내어준다. 어떤 책은 상당한 고가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거나 귀한 책은 어떻게든 사게 된다. 준비가 안 되면 그날은 그냥 돌아 가지만 곧 이 책이 눈에 아른거려 돈을 마련해 다시 가서 산다.
회현동에 있는 헌책방 클림트나 중고 서점 알라딘이나, 가끔은 교보문고에서 신간을 사기도 한다.
한 해 한두 번은 인사동 통문관에도 들른다. 그리고 인사동 난전에서 고서도 사게 된다.
한번은 인사동 난전에서 어떤 노인이 좌전(左傳) 두 권을 펼쳐 놓았다. 필사본으로 조선 한지에 기름을 먹였는데 주묵(朱墨)으로 구두점까지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 책은 선비가 공부하던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추석 전날이라 자신이 메겨 놓은 가격보다 싸게 팔겠다고 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마침 손녀를 데리고 나온 참이라 덜컥 사고 말았다. 그 노인은 고맙다며 손녀에게 옛날 동화책을 선물로 주면서 “정말 좋은 책 사셨소. 이 책은 황간 어느 시골집에서 구했는데 나도 평생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고서를 샀지만, 이런 책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책이라오.”라며 묻지도 않은 말까지 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은 사서삼경을 뗀 다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이 책을 볼 때마다 선비의 숨결이 느껴진다.
몇 해 전 통문관에서 훈민정음 ‘간송 영인본’을 보게 되었는데 사지는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안평대군의 특집기사가 모 일간지에 실려 훈민정음의 한자가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통문관에서 보았던 영인본이 떠 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 추석 명절이라 자식들이 아버지 용돈이라고 내어놓은 돈을 들고 통문관을 찾았다. 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책값을 5만 원이나 깎아주었다. 얼른 지갑을 열어 값을 치렀더니 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책 주인이 따로 있네요, 귀한 책이니 잘 간직하세요.”
“이 책은 가슴에 품고 집에 갈 거예요.”
나는 책 중에서 수필집을 좋아한다. 특히 이름난 수필가의 초간본이나 희귀본은 아무리 비싸도 산다. 어떤 땐 사지 못하면 그 책이 눈에 밟혀 밤새 뒤척이다 다음날 기어이 사고 만다.
나는 책 중에 무조건 사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범우사에서 만든 문고본이다. 이 책은 가격도 저렴하지만 간편하게 소지하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어 보이는 족족 산다. 어디 갈 때는 가방에 한 권씩 넣어 다니면서 읽는다. 그런데 이 출판사를 차린 범우 윤형두 선생은 나와 같은 지독한 탐서가(探書家)에 책 소장가(所藏家)이기도 했다.
범우 선생은 출판사 사장이기보다는 책 애호가였다. 그는 타고난 문장가에 수필가로 책을 사랑했다. 선생도 어릴 때 집이 가난하여 책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그는 책을 빌리기 위해 몇 십리 길을 마다치 않고 다녔다. 엿장수나 고물 장수가 바꿔 온 책이 있으면 집에 있는 놋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했다.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은 물론 헌책방 순례에도 나섰다.
국내는 물론이요 해외 특히 일본, 간다(神田)에 있는 고서점은 해마다 들려 책을 샀다. 책을 사기 위해 숙소도 그곳에 단골 여관과 식당을 정해 놓고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유숙을 하면서 책을 샀다. 그는 산 책을 들고 서점가 뒷골목 단골식당으로 가서 된장국에 생선 한 토막, 닭꼬치 하나를 시켜놓고 일본 청주 한잔을 마시면서 사 온 책을 꺼내보았다. 잘 산 책이 있으면 기분 좋아서 한 잔, 잘 못 산 책이 있으면 기분을 달래기 위해 한잔하면서 거나해지면 숙소로 돌아갔다.
나의 책 사는 버릇은 이젠 중독을 넘어 병적이라 할 정도이다. 강남 알라딘 중고 서점엘 가면 책 중독자라는 글을 써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책 중독 증세 열 가지가 있는데 나는 여덟 개나 해당한다. 이런 나를 아내는 아주 못마땅해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내 몰래 사 온 책을 현관 앞에 두고 한참 후 아내의 눈치가 느슨해지면 슬그머니 들고 들어온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책을 제대로 다 읽지도 않고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책만 사는 바보임이 틀림없다. 이덕무(李德懋)는 집이 가난하여 남의 책을 베껴서 책만 읽는 바보라 했는데 나는 책만 사고 있으니 간서치(看書痴) 이덕무가 보더라도 나무랄 것 같다. 하지만 범우 윤형두 선생은 빙긋이 웃으면서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줄 것 같다.
새로 사 온 책은 그날 저녁에 꼼꼼하게 살펴보며 읽는다. 당장 읽고 싶은 책은 책상 위에 쌓아놓고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은 책상 주변에 두어 내 눈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 책 읽기 버릇도 범우 선생과 비슷하다. 선생은 새벽에 일어나 서재로 가서 간밤에 읽었던 책과 원고지들 사이에 놓아둔 식은 커피잔에 남겨진 커피를 마시며 정신이 맑아지면 책을 읽거나 원고지에 글을 썼다. 나 역시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커피 한 잔 태워 옥상 서재로 올라가 책상 위에 쌓아둔 책을 읽거나 수필을 쓴다. 새벽에 책을 읽을 때는 밑줄을 그어가며 꼼꼼하게 정독한다. 그리고 내 생각을 책에다 연필로 긁적여 놓는다. 관심이 가지 않는 부분은 건너뛰며 읽고 나서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으며 긁적여 놓은 글들을 모아 독서 일기를 쓴다.
범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다가온다. 선생은 범우문고를 비롯해 5천여 종의 양서를 출간하고 자신의 수필집 20여 권도 출간했다. 나는 은퇴하고 10년 동안 모은 책이 5,000여 권이 된다. 지난여름에는 그동안 써온 수필 60여 편을 모아 『구름방』이라는 수필집을 출간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다. 그것은 내가 모은 책들을 자그만 도서관이랄까 북카페 같은 서사(書舍) 즉, 책 곳간 하나 만들어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꿈이다. 내 생에 이루지 못하면 자식이나 손주들이라도 이루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누군가 그 꿈을 이루어 책이 좋아 책과 함께 살면서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을 하면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을 꾸어본다. 그 집의 이름은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로 하면 좋겠다.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는 윤형두 수필집으로 책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에서 수서(蒐書)의 재미, 열정적으로 책 만들기 등이 실려 있다. 선생은 이 책에서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