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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微)

그냥 글이 써졌어

by 민창

1.

아침이라고 말하기에는 어색한 시간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을 여는 것이다. 환기를 하고,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냄새를 즐긴다. 창문 바로 앞에 선 나무는 황금빛 잎을 달고 서서, 천천히 쥐고 있던 잎사귀를 하나둘 떨군다.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한다. 어제 사둔 원두를 꺼내 수동 그라인더로 갈기 시작한다. 원두 20g으로 만드는 688 레시피의 필터커피. 이제는 아이스보다 따뜻한 커피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필터커피의 매력은 원두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끓이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적셔준다는 마음으로 물을 떨어뜨린다. 물에 적신 원두는 자신이 지닌 향과 맛을 천천히 물속으로 풀어내며 서버로 내려온다. 그렇게 정성이 스며든 한 잔의 커피는, 다채로운 향과 온도를 품게 된다.


커피를 내리며 주의해야 할 점은 오버추출이다. 물이 너무 오래 닿으면, 원두가 지녔던 좋은 향은 사라지고 쓴맛만 남는다. 그래서 원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커피를 내릴 때 되도록 3분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쓴맛을 가진 커피 몇 방울이 전체의 조화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몇 방울이 한 잔의 맛을 흐리고, 마실 때 불편함을 남긴다.


커피를 내리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 세상도 커피를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것이 변화를 줄 수 있는 세상. 작은 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아는 세상. 맛의 우위 보단, 결국 모든 조화가 더 중요하단 걸 아는 세상.

...

너무 갔다.


2.

누군가에겐 작아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내겐 하루의 기분을 정하는 행동이다. 어릴때 부터 나는 무단횡단이 싫었다. 무단횡단은 좋은거라고 괜찮다고 교육하는 유치원과 학교는 이 세상 어떤 곳에도 없을테니 말이다. 아무리 짧은 횡단보도 여도 초록불을 기다린다. 하얀 짝대기가 열 개도 안그려진 횡단보도여도 나는 기다리고 싶다. 짧은 횡단보도를 기다리다가 약속에 지각한 적이 여러번 있다. 그 때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걸'이라는 후회가 아닌, 집에서 '십 분 만 더 일찍' 나올 걸이라는 후회를 한다.


그치만, 아쉽게도 초록불을 기다리지 않고 건넜던 기억이 있다. 같이 걸어가는 지인들이 당연하듯이 짧은 횡단보도를 건널때. 그때 나는 머릿속에 인식은 했지만, 지인들과 함께 건너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찝찝한 마음을 느꼈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가고 싶은 장소가 우리 가족이 있는 도로 건너편에 있었다.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는 십 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아빠는 차 안올때 빨리 건너자고 했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그냥 십 분을 걷자고 이야기했고, 아빠는 투털거리시면서 우리 가족이 함께 멀리 돌아 횡단보도를 건넜다.


짧으니깐 그냥 건너자. 언제 초록불 기다리냐. 시간이 아깝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일이 길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짧든 길든 기다림의 가치는 같은 게 아닌가.

그냥, 어려서부터 빨간 불에 건너면 내가 나에게 지는 기분이었다.

이정도도 기다리지 못하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 작은 행동 때문에 내가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3.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3000년을 산 일본 다케오시에 있는 녹나무.

높이 27m, 뿌리 둘레 26m.

처음 봤을때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보이지 않고 너만 보였다.

세월을 마주쳤다는 게 이런느낌인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돌과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고,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때 씨앗으로 땅에 떨어졌겠구나.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세웠고,

동양에서는 주(周)나라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고,

그 시절 사람들은 점토판에 문자를 새기며

청동 거울에 하늘을 비추었을때 너는 묘묙이었겠다.


부처가 설법을 했고, 공자가 도를 논했으며, 예수님이 탄생했을시기

이미 너는 천년을 살았겠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3,000년은 혁명과 전쟁, 문명의 순환이었다.

그러나 녹나무에게 3,000년은 단지 3,000번의 바람과 햇살이었다.

나무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한 자리에 서서, 작은 뿌리로 땅을 붙잡고 조용히 세상을 품었다.

세월을 배운다는 건, 작은 자리를 오래 지키는 일이겠구나.




4.

독서의 속도를 조율하는 책갈피.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섬세하며, 조화를 잃지 않는 커피내림.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향기가 되겠노라.


거대한 문장이 아닌,

작게 적힌 한 줄의 다짐.


화려함 대신 깊이를,

크기 대신 온도를,

속도 대신 방향을

이 모든 걸 품는 것이 '미(微)'라면,

기쁘게 작음을 꿈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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