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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드는 방 Oct 25. 2024

오빠들의 전성시대

나의 독수리 오빠들에게

“잘생기면 다 오빠지!”


언제,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곱씹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명언이다. 더 이상 나이 차이 계산이 민망할 만큼 어리디 어린 ‘오빠’들이 매체 불문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죄스러워 차마 소리 내어 불러보진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당당하게 ‘오빠’를 외치던 날들이 있었다. 집에서는 K-장녀이자 한 살 차이 남동생의 누나였지만 텔레비전을 켜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면,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언제든 나의 오빠들은 나를 향해 햇살보다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오빠들에게 헌정하는 뒤늦은 팬레터이자 감사패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꿈꾸게 했던 모든 ‘오빠’에게 이 글을 바친다.




“야! 우리 오빠 어제 가요톱텐에서 춤추는 거 봤어? 짱 멋있지?”

“가수가 웬 춤? 우리 오빠처럼 가창력이 돼야 가수지!”


그 무렵 여중, 여고 쉬는 시간이면 반 마다 열띤  ‘우리 오빠 배틀’이 펼쳐졌다. 가창력과 댄디함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던 발라드파와 현란한 댄스와 강렬한 랩으로 10대들의 영혼을 지배하던 댄스가수파. 두 파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우리 오빠가 너네 오빠보다 더 잘난 이유’를 끝없이 나열하던 그곳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빠순이들의 전쟁터였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오빠들은 가요톱텐 무대가 아닌 장충체육관과 잠실농구장에 있었다. 파란 유니폼을 입고 주황색 공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나의 키 큰 오빠들.


"람보 슈터 문경은"

"컴퓨터 가드 이상민"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

"스마일 가이 김훈"

"공룡 센터 서장훈"


방과 후 친구네 집 텔레비전 앞에 모여 농구대잔치를 보며 목놓아 불러대던 애칭과 이름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현란한 드리블에 정확한 삼 점 슛, 든든한 리바운드까지 모든 게 완벽한데 얼굴까지 잘생겼던 우리 독수리 오빠들. 오빠들 만나러 꼭 다 같이 연세대학교 가자고 굳게 다짐했던 중3 소녀들의 뜨거운 우정은 ‘같은 팀은 응원하되 최애는 겹치지 않는다!’라는 불문율을 지켜냄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유지됐다.


대학팀으로는 최초로 농구대잔치 정상에 오른 연세대학교 농구팀. 왼쪽부터 서장훈, 문경은, 김훈, 우지원, 석주일. [중앙포토]


그 해 독수리 오빠들은 농구대잔치 최초 대학팀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오빠들이 우승한 93-94 농구대잔치에는 실업 8개 팀과 대학 4개 팀이 출전했다. 농구대잔치는 1,2차 대회를 거쳐 최종 8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대학 종합성적 3위였던 연세대는 1차 대회 3연승, 2차 대회 11연승이라는 신들린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플레이오프에 1위로 진출했다. 8강, 4강을 거쳐 마침내 상무와의 결승전!! 연세대는 3승 1패를 거두며 농구대잔치 사상 첫 대학팀 우승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93년 12월부터 94년 3월까지 목이 터져라 오빠들을 응원했던 우리들의 시간도 함께 보상받던 순간이었다.


당시 대학농구팀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팀은 어딜 가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다. 특히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장과 숙소 앞은 1년 365일 오매불망 오빠들만 기다리는 단발머리 소녀들로 가득했다. 나 또한 열정의 농구 팬, 아니 오빠부대로서 꼭 한 번은 오빠들의 멋진 경기 모습을 직접 관람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과감히 학원을 땡땡이 치고 성공적으로 장충체육관 관중석에 입성했다. 내 방 벽지에 붙여놓은 브로마이드에서 날 보고 웃던 문경은 오빠가 손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뛰고 있었다. 매일같이 티브이로 보고 또 보던 파란 유니폼의 영웅들이 땀 흘리고 소리치며 직사각형의 농구코트 안을 쉬지 않고 날아다녔다. 농구 코트 바닥에 농구화가 닿을 때마다 삑- 삑- 생생하게 들리던 마찰음, 선수들끼리 주고받던 작전의 눈빛과 손짓, 환하게 빛나는 불빛 아래 번들거리던 땀에 젖은 이마와 유니폼, 오빠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강렬한 함성으로 반응하고 호응하던 관중석의 열기.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한 날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것의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오빠들을 응원하며, 그 뜨거운 열정을 목격하며.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갈비뼈에 금이 갔다. 오빠들의 퇴근길을 보려고 혈안이 된 소녀들의 행렬에 껴보려다가 하필이면 돌계단 위로 넘어진 것이다. 그 후로 약 한 달가량은 숨만 쉬어도 짜릿했다. 숨만 쉬어도, 젓가락만 들어도, 책만 펼쳐도, 웃기만 해도 언제든 예고 없이 갈비뼈가 찌릿찌릿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 직관이 남긴 영광의 상처이자 행복의 아픔이었다.




94년 3월, 오빠들은 대학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 트로피를 안았고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일단은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고등학생이 됐다. 함께 농구대잔치에 열광하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를 보며 장동건파와 손지창파로 나뉘어 또다시 ‘내 오빠 네 오빠’ 대결에 열을 올리며 ‘농구는 나의 인생!!!’처럼 살던 나와 친구들. 우리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농구대잔치가 아닌 입시대잔치에 올인해야 하는 K고딩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뜨거웠던 우리끼리 오빠부대의 겨울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그 후로 오빠들을 완전히 잊고 산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의 방 벽지에는 여전히 파란 유니폼을 입고 삼 점 슛을 쏘거나 드리블을 하는 오빠들이 가득했고, 연세대 농구부 화보집 AKARAKA 1,2권은 오랫동안 나의 보물 1호로 책꽂이를 지켰다. 고2가 되자마자 나는 아버지의 주재원 발령으로 중국으로 나가게 됐고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 오로지 신문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편지를 통해서만 가끔씩 오빠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97년 1월, 연세대 농구부는 다시 한번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94년도 우승 당시 막내였던 서장훈 오빠 외에 모든 멤버들은 상무와 실업팀으로 흩어진 상태였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같은 해 2월 1일, 한국프로농구 첫 시즌이 개막했고 이후 농구대잔치는 규모나 권위 모두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97년 봄, 오빠도 오빠부대도 인생의 또 하나의 큰 챕터를 따로 또 같이 닫고 열었다.




올해는 연세대가 대학팀 최초로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지 딱 30년째 되는 해다. 그사이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대부분 아이 엄마가 되어 워킹맘으로, 프리랜서로, 전업주부로 바쁘게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중년의 길에 접어든 오빠들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여전히 열일 중이다. 과장 조금 보태 TV나 유튜브를 켜기만 하면 볼 수 있는 선녀 보살, 아니 공룡 센터 서장훈 오빠는 날카로운 조언과 따뜻한 위로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방송을 이끄는 전문 MC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람보 슈터 문경은 오빠는 한국 프로농구팀의 기술 자문으로, 컴퓨터 가드 이상민 오빠는 프로농구팀 코치로 여전히 농구 코트를 지키고 있다. 스마일 가이 김훈 오빠는 14년째 농구교실을 운영하며 농구 꿈나무 육성에 매진 중이다. 그런가 하면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 오빠는 배우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와의 계약소식이 들려온다.



가끔 티브이 화면이나 뉴스 기사에서 보이는 중년의 오빠들의 모습에 '아, 세월이여!!'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본다. 단발머리 여중생이었던 나도 흰머리와 주름에 한숨짓는 아줌마가 되어있지 않은가. 모습은 달라졌어도 그 시절 오빠들과 오빠부대의 반짝이던 추억은 여전히 가슴 한편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삶이 지루할 때, 철든 어른인 척 살아내야 하는 일상이 고달플 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로 가슴이 답답할 때, 각자의 마음속 추억의 보물상자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가장 열정 넘치고 뜨거웠던 시절, 조건 없이 마냥 행복하게 누군가를 응원했던 순간,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던 순수의 시간. 그 아름다운 장면들은 여전히 녹슬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남아 내가 먼지 쌓인 뚜껑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빠들과 오빠부대의 전성시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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