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존심은 하늘 같았지만, 자존감은 낮았다. 낮은 자존감은 직장을 잃으면서 더욱 낮아졌다.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뒷받침해 줄 경제력을 잃자 망가진 자존감은 열등감이 되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직장을 구했고, 어머니가 담당했던 나의 통학은 아버지가 맡게 되었다.
2시간 가량 단둘이 이동하는 차 안은 살얼음판이었다. 일상적인 행동과 말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조금이라도 심기에 거슬리면 "나를 무시하냐"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고속도로 갓길에서 위험하게 끌어내려져 폭행을 당했던 것도 드물지 않았다.
라디오를 들으며 가는 차 안, 아버지는 개돼지들이 즐비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가지각색 늘여놓았다. 듣던 내가 자연스레 드는 의문과 반박을 던졌을 때 이루어지는 폭력은 특히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비로소 나 자신을 '결백'하다고 말할 수 있는 데에도 쏟아지는 과한 폭력에 억울함이 북받쳤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폭력 앞에는 눈물로 비는 수밖에 없으니 남은 것은 굴종과 치욕이었다.
비슷한 사건들이 쌓여갔다. 폭력의 현장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한 채 당사자들의 이야기만 전해 들은 어머니와 손위형제가 내놓은 답은 '양비론'이었다.
둘 다 잘못했네, 네가 공손했어야지-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이 방관자로 전락하는 순간, 참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자해를 시작했다.
이때 자해는 풀지 못한 분노를 내 몸에 해소했을 뿐이었다. 수치와 울분이 쌓여가는 그 수많은 순간, 나는 자살을 꿈꾸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죽는단 말인가.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죽는다고 억울함이 풀리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 잘난 자존심을 짓밟아 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도 더 좋은 곳을 나오고, 장학금 받아서 당당하게 연을 끊어야지- 하면서.
이를 갈며 세웠던 목표로 향하는 길에서 잠시 휘청거릴 때도 있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쩌지? 그때는 정말 어찌할 수 없이 절망스러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