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의 상처 (3), 수구꼴통에서 빨갱이까지
나의 이야기
소득 수준도, 교육 수준도 높았던 지역에서 새로 전학을 가게 된 곳은 아버지의 회사 근처였다. 전학 간 직후에는 몰랐지만, 그곳은 당시만 해도 '학력 꼴찌'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전학 간 동네는 해당 도시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그야말로 '폭풍의 전학생'이었다. 명품은 아니지만, 평범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갔을 때에는 반 아이들이 빙 둘러 구경을 했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본 적 있다는 나의 말에는 '부자네-'라며 응수했다. 친해진 지 한 달 된 친구는 한부모 가정이라는 고백을 해왔고, 그때 나는 '이혼'이란 단어를 책 바깥에서 처음 들었다.
아이들은 대학 이야기 대신 취업과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 이야기, 이루고픈 직업 대신 결혼 로망 이야기를 했다. 학교 점심시간 이후에는 담배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등 모든 생활이 달라졌다. 전학을 온 목적이었던 영어 과목 등수는 100등 바깥에서 '8등'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반 년도 안 되어서 내 영어가 그렇게 늘었을 리가 없는데. 기쁨보다는 혼란만 가득했다.
분명 한국이고 같은 수도권인데, 왜 이렇게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을까.
학원을 다니는 애들도 거의 없어서 매번 어머니가 왕복 2시간씩 다른 동네로 '픽업'을 해주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줄 알았던 성과가 오롯이 나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구나. 부모의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구나.
그때부터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원했던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여러 철학, 문학, 사회학 책을 탐독했다. 비로소 자아가 만들어지고 인권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정치 성향-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가정에서 당했던 일들을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