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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 Nov 01. 2024

가정폭력의 상처 (6), 관계의 투영과 회복

나의 이야기

과거 가정폭력의 상처는 흉터가 되었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예전처럼 우리 집은 집기가 날아다니고 부서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야 나는 결국 무너졌다.


약물 치료를 시작한 요즈음, 시끄럽던 머릿속을 잠시나마 잠재우고 미친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머나먼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생활을 헤집고 더듬었다. 그리고 이제 내 상태를 다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 면역력 약화'라고.


나의 상태는 '슬픔의 5단계' 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슬픔의 5단계'는 '분노의 5단계'라고도 불리는데, 이 개념은 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가 자신이 관찰한 임종 직전 환자들이 겪는 감정의 단계를 5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대부분의 임종 환자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차례로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Five Stages of Grief

중증 우울증이 감히 죽음과 비견되지는 못하지만, 나 역시 부정과 분노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나 싶다. 혼자서도 가정폭력 등 거대한 장애물을 잘 이겨냈다고 자부했기에, 고작 이제 와서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나약한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고 화가 났다. 흔한 20대 청춘의 일시적인 불안이라며 상태를 평가절하했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감기 같은 질병"이라는 지식은 교과서의 내용일 뿐,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게 일어날 리 없다고 여겼다. 실제 감기도 걸려 본 횟수가 평생에 5번을 넘지 않는데 감기라니! 드물지 않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그 어감조차 너무나 하찮아서 끙끙 앓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흉터도 면역력이 약화되면 다시 고름이 차지 않던가. 회사도 버리고 선택한 길, 경제적 수입이 줄어들면서 운동도, 취미도 즐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체력이 떨어지니 능률도 닳아갔다. 능률이 떨어지는 와중에 외부의 친구들을 만나 숨 돌리는 짓은 옳지 못하게 여겨졌다. 2년간 선배도, 후배도, 동기도 없는 대학원 생활 중 인간관계는 오로지 '지도교수님' 하나만이 남았다. 자연히 나의 모든 인간관계, 성취에 대한 기대는 교수님께 의탁하게 되었고,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격한 변화는 없었지만 일상생활의 작은 부분들이 하나둘 삐그덕거리더니 어느새 어디부터 손보아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문제의 가장 핵심인 '지도교수님과의 관계'도 그 이면은 가정폭력의 경험과 맞닿아 있었다. 지도교수님은 내게 중요한 권위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친부와 동일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족 내에서 충족되지 못한 정서적 지지와 감정적 욕구를 교수님과의 관계에 투사하고 있었다. 연인의 생활을 존중한다고 했던 쿨-한 내 행동들은 타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결여된 메마른 마음의 반영이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신뢰와 인정에 대한 갈망'이 교수님의 반응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를 키웠다. 교수님의 관계에서 느끼는 민감함은 상처의 쓰라림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가정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호승심과 오기로 과거를 이겨낸 게 아니라 건강하게 극복하고 치유할 기회를 건너뛴 것에 가까웠다. 가정 폭력의 경험은 본래 점진적으로 치유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먼 길을 처음부터 걸으려 한다. 가정 폭력의 경험이 나의 평소 생각과 행동에 어떻게 녹아 있었는지 자각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건강하게 경계를 설정하는 법까지- 인내심을 갖고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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