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나의 아픔을 지인에게 처음으로 드러낸 건 성경 공부에서였다.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끔찍한 비밀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털어 놓았다. 정작 말을 하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하며 손가락질하지는 않을까? 신랑의 얼굴에 먹칠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말을 한 건 이기심이었다. ‘의인의 간구’ 나를 위해 사모님과 신실하신 분들이 기도해 주신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믿음에서 말을 꺼내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사모님과 집사님들은 함께 울어주시고 기도해 주셨다. 내 어깨를 토닥이며 ‘힘들었을 텐데 집사님 정말 잘 컸어요. 예뻐요.’ 지난날을 버텨온 내게 절실한 말이었다. 난 지금껏 실패자였다. 가정이 불행했기에. 아빠에게 늘 ‘낙오자, 패배자’란 말을 듣고 자라왔기에. 그런 내게 이쁘다니 잘 컸다니. 힘들게 버티며 살아온 나를 알아준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내 상처를 드러내고 나니 사람들의 아픔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 아픔의 객관화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과거에 얽매여 집착하며 살아갔구나. 어쩌면 이런 집착이 나의 상처를 더 덧나게 한 거는 내가 아니었을까? 조금씩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명쾌함을 느낀 그날 신랑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오늘 기분 좋아. 예전에 했던 자기 말이 받아들여진달까?’
‘어떤 거?’
‘자기가 전에 그랬잖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다고. 그땐 아픈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왜 꺼내냐며 버럭 화를 냈지만,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면서 느끼는 바가 있달까? 아픔은 주관적인 거라 저울을 달 수 없는 거였어. 난 늘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물론 그렇다 하여 내가 상처받거나 힘들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 말했잖아. 부와 행복 둘 다 있으면 그건 성공한 삶이겠지만 그 중 뭐 하나 없다고 하여 실패한 삶은 아니야. 보통의 삶인 거지. 부와 행복 다 있는 가정이 얼마나 있겠어. 그래도 뭔가 자기가 덜 힘들어 보여서 다행이다.’
내 아픔을 굳이 떠벌리며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여 숨길 일도 아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았던 것이. 그것이 나를 한계에 가두게 했고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렇게 내 아픔은 곪아 터져버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