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저도 나를 힘들게 했구나.
그냥 시간에 모든 문제를 맡긴 채 지내던 어느 날,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생일 어떻게 할 거야? 너 말고 제부.’ 그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애써 무시했던 생각과 감정들이 상기되었다. 우연히도 때마침 정신과 상담이 있어 그곳에서 나의 고민을 토로했다.
(나) 선생님, 저는 왜 자꾸 부모님께 상처를 주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선) 상처를 주고 싶은 건 지금의 미정 씨예요? 상처받은 미정 씨예요?
(나) 상처받은 저요.
(선) 상처를 주면 미정 씨 마음이 편해요? 생각해 보자고요. 미정 씨가 받은 상처만큼 똑같이 상처 주고 그래서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고 한다고. 마음이 편한가요?
(나) 아니요, 불편해요.
(선) 그런데 왜 상처를 주고 싶어 해요? 상처를 주려는 그 마음이 미정 씨를 힘들게 하는데.
(나) 복수하고 싶어서요. 치유한다고 해도 결국엔 남아있잖아요. 상처가 완벽히 지워지지 않잖아요.
(선) 상처를 준다고 해서 미정 씨 마음이 편하면 그래도 되는데 미정 씨도 편하지 않다고 했잖아요. 자, 쉽게 동물에 비유해 볼게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가볍게. 사자가 사냥한다고 칩시다. 하이에나를 잡아먹는데 하이에나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순간에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상처를 입었어요. 사자의 마음은 어떨까요?
(나) 글쎄요? 별 신경 안 쓸 것 같아요.
(선) 그러면 이거는요? 하이에나 무리가 사냥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자가 옆에 있다가 의도치 않게 공격을 당했단 말이에요. 하이에나들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면 사자의 마음은 어떨까요?
(나) 화가 날 것 같아요. 감히 동물의 왕인 나를 건드려? 하면서요.
(선) (웃음) 사자는 신경도 안 써요. 미정 씨 말대로 동물의 왕, 최상위 포식자예요. 그러거나 말거나에요. (웃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죠?
(나) 네.
(선) 제 말은 미정 씨는 그만큼 강하다는 거예요. 두 아이의 엄마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고 그리고 한 가정을 책임지는 안주인이에요. 강한 사람이 왜 자꾸 복수를 하고 상처를 줄 생각을 해서 미정 씨가 힘들어하냐 이 말이에요. 사자가 되세요. 그러면 미정 씨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요.
(나) 사자가 되라고요…? 쉽지 않네요.
(선) 쉽지 않아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죠. 이건 미정 씨 부모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미정 씨가 앞으로 쭉 살아갈 때도 필요한 마음 자세예요.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지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건데. 그때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눈물 흘리고 상처 주려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또 주고 할 건가요?
(나)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명심하겠습니다.
(선) 또 궁금하거나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나) 아, 요즘 고민거리에요. 내일모레면 아빠 생신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아빠 생신에 갈 거냐고. 이 상황에 생신 챙기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안가지 했더니 '너 말고 제부 말이야.' 이렇게 묻기에 안 보낼 거야. 단호하게 말했는데 통화 끊고 생각해 보니 걱정이 되더라고요. 자기 생일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우리 신랑 욕하면 어쩌나 혹은 우리 신랑에게 아버지 생신이니까 전화 한 통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엄마가 우리 신랑 난처하게 하면 어떡하냐고 하면서 걱정이 되더라고요. 신랑 그 연락 받고 얼마나 당황할까 싶어서 신랑에게 아빠 생신이라고 말할까 싶다가도 그 문제로 신랑과 충돌이 생길 거 생각하니 신랑에게 말하기도 싫어지고 그렇더라고요.
(선) 언니가 말 잘했네요. 안가겠다고 하는 건 미정 씨 마음이고 배우자분은 갈지 말지 그건 또 배우자 분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말씀하세요. 곧 있음. 아버지 생신인데 당신 가고 싶다면 가라 대신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요.
(나) 갔다가 환대도 못 받고 욕먹으면 어떡해요? 전 그런 게 싫은 거예요.
(선) 제가 늘 말씀드리죠? 그건 배우자분이 감당할 몫이라고요. 간다고 할 때는 그런 것도 다 감내하고 가겠다. 이런 뜻이에요. 이런 상황 속에서 그걸 모르고 간다고 하겠어요? 그러니 일단 배우자 분과 이야기 나누고 그다음에 통보하세요. 미정 씨 사자가 되시라고요.
상담이 끝난 후 난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어째서. 여전히 약자인 엄마에게 큰소리치려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나약하고 저열함을 방증하는 사고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엄마가 아닌 아빠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뭐라고 보내야 할까? 당신들 때문에 정신과와 심리상담을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다고 상처받은 나를 인정해 달라고 말해야 할까? 문자 내용으로 고민하는 나를 보며 신랑이 그런 나를 제지했다. 사자가 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라며. 신랑의 도움을 받아 담백하지만 당당하게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아직 아버지와 이야기할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서 문자로 합니다. 전 정신과랑 심리상담 다니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일 생신인데 이번에 우리 가족은 함께 축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미리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세요.’
늘 아버지에게 형식적인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면 굴복감이 들어 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사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내고 나니 그런 감정 따위 느낄 수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렇게 쉬운 것을. 뭐가 이리 힘들었을까? 어쩌면 상처받은 나를 알아줬음 해서 스스로 강인해지는 것을 거부한 것은 아닐까? 자꾸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해서 그래서 내가 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마저도 나를 힘들게 했구나. 더는 내가 나를 할퀴며 아프게 살아가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