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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병 밖을 나온 루기
Nov 23. 2024
달팽이가 외출하는 법
약속시간 지키기
달팽이는 나다. 내가 달팽이, 느림보, 거북이, 지각쟁이 뭐 그런 거다.
분명
일찍
나서겠노라
다짐했건만,
오늘도 늦었다.
우리 집 현관문 바로 앞은 엘리베이터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마침 우리 집 택배를 들고
있는
기사님을 마주친다고 하자.
그렇다면 기사님은 타고 계신 승강기에서 내릴 필요도 없다.
"기사님 던지세요."
힘 조절만 잘하신다면, 택배는 우리 집 현관에 안착하게 된다.
사실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다.
22층
23층
25층
내가 집에서 미리 호출해 놓은 승강기가 우리 집을 향해 오고 있다.
저걸 놓치면 약속에 늦는다.
현관에 있는 아무 신발을 얼른 구겨 신고,
일단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차차, 오늘 많이 걸어야 하는데 발을 내려다보니
발이 아플 것 같은
굽이 납작한 구두이다.
얼른 다시 운동화를 챙겨 들고 갈아 신으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린다
.
마음이 급하다.
일단 집 앞 복도로 나갔다.
내 발에 있던 구두를
반쯤
벗어
,
문
열린
현관으로
발차기하듯
던져 넣는다.
승강기를 등지고 양말바람으로 양손에 운동화를 들고 있는데
,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어, 어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엘베 잡아 주게요."
위층에 사시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다.
이런 민폐다. 아저씨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운동화를 손에 들고 총총 뛰어 얼른 승강기에 탔다.
구두는 현관으로 던졌고, 운동화는 손에 쥐고 있으니
여전히 양말
바람인 채로.
승강기에 타고 보니 어랏.
우리 집 현관문이 열려있네?
"아 잠시만요 죄송해요."
운동화를 엘베에 던져(내려) 두고 두다다 바람을 가르며 현관문을 닫은 뒤 다시 탔다.
그제야 웃으며 인사한다. 우아하고 상냥하게
"어머 안녕하세요."
태연하게
바닥에 있던 신발을 주워 신는다.
아저씨는 좀 놀란 눈치시다.
묻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대답한다.
"아 괜찮아요. 늦어서 좀 서두르느라."
머리를 감고 나갈까 말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
옷 입는데 5분, 머리 감는데 10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머리를 감기로 결정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오늘따라 1층까지 가는 동안 여러 번 정차 중이다.
17층에서 문이 열리자, 한 라인에 사는 친한
동생의
남편이 들어온다.
우리는 승강기에서 스몰토크를 자주 하는 편이다.
"아이고 바쁘셨나 봐요. 머리 덜 말리고 나오셨네요?"
"어유 머리까지 말릴 시간이 없었어요. 양말도 못 신고 나왔는걸요."
하고 말하고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양말을 꺼낸다.
운동화에서 발도
꺼낸다.
양말을 신는다.
이 아저씨도 놀란 눈치다.
여자들의 화장기술 만렙 중에 하나가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니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아이라인 그리는 거야.'
할 수 있으신 분? 저 정말 깔끔하게 잘 그려요.
대학교 다닐 때 매일 연습했거든요. 버스에서. 아이라인 그리기. 수업 늦어서.
(혹시나, 아침부터 저의 까뒤집어진 눈을 보신 분이 계셨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그나마 좌석이 높아서
얼굴이
가려지는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음을 밝힙니다.)
회사 다닐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
회사에 가는 버스에서 내리면 왕복 10차선의 큰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그 시간 포함 10분 정도 걸어야 회사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5분이 남은 거지. 5분이 모자라다. 5분 지각이란 얘기다.
아 어쩌지.
급히 지나는 택시를 불러 세운다.
택시를 타면 유턴해서 내리면 되기 때문에 신호등 신호도 안 받아도 되고, 5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맞은편에 보이는 회사 건물까지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초능력이 없어서 택시비를 날렸다는 슬픈 이야기.
혹시나 이런 경우 조금 늦어도 내가 회사까지 온 경위를 얘기하면 팀장님이 봐주시기도 했다.
나의 노력이 가상해서.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는 일이다. 개인 간의 신뢰는 약속시간을
지키
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교통 체증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10분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하여 나서기를 추천한다.
알면서 왜 못하는 건지.
내가 죽인 다른 이의 시간에게 사과를 고한다.
(실제로 커피도 많이 샀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살게.)
나는 아직도 늦는 습관을 고치는 중이다.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오고, 선크림은 차에서 바르고, 양말을 승강기에서 신는 덕에 늦지 않는 횟수가 더 많아지고 있다. 그냥 집에서 10분 일찍 준비하면 안 되는가? 한심하다. 자문자답이다.
진지하게 성인 ADHD인가 생각해 본 적도 있는데, 검사는 안 해보았다.
이렇게 글로 쓰는 김에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10분 일찍
도착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우아한 사람이 되자.
위의 에피소드들은 제가 실제로 말로 풀어내면 다들 재미있어하던데 읽으시기에도 재미있었을까요?
항상 약속시간에
10분
일찍
도착하고,
매사에
서둘러서
늦지 않는
우리
남편이 이 글을
읽으면
싫어할
것 같네요. 부끄러운 치부를 세상에 내어 놓았다고.(안 보여줘야지)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괜찮아 여보.
지각쟁이는 이제 진짜
진짜
그만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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