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형제 최고의 책을 꺼내라
아직 글 읽기도, 쓰는 것도 서툰 우리 집 막내아이가 책을 읽어 달란다.
모처럼 휴일, 밀린 빨래 한 산으로 쌓아놓고는 개는 일에 열중이었던 나는 힐끗 책을 본다.
얼굴에 개구쟁이라고 쓰여있는 소년이 금붕어 두 마리가 들어있는 어항에 손을 대고 있다. 어항은 금세라도 쏟아지기 일보 직전. 표지만으로도 장난기 많은 우리집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책
안돼, 데이빗!
귀찮기도 했던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벽에 낙서하기, 음식 가지고 장난치기, 입에 한꺼번에 음식 넣기, 욕조에 물 넘치게 받아놓고 욕실 흥건하게 만들기, 침대에서 뛰기, 콧구멍 후비기, 방에서 공놀이하기...
책에 나오는 데이빗의 말썽은 모두 우리 집 세 아들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어쩜 이리 똑같을 수가!
이것이 바로 삼형제 최고의 책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세 아이를 키우며 이 책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 최대한 단호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연기하며 데이빗 끝자락에 붙은 느낌표까지 연출할 경지에 다다른 듯!
연기 수준으로 말하자면 주연상은 아니더라도 조연상 정도!
”안돼, 데이빗! 안된다고 했지 “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낼 때 꼭 평소의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엄마같이 괴팍하게 혼내는 사람이 책에도 있다는 동질감에서인지 세 아이 모두 이 책을 좋아했다.
빨래를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는 막내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읽어 내려가는데 3학년, 6학년 아이가 덩달아 내 무릎 언저리로 다가서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책을 본다.
다 큰 아이들 세녀석이 둘러앉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낭독자인 나도 왠지 신이 난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다른 시기, 비슷한 나이에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곤 했지. 어떤 책은 읽어주다가 눈물 콧물 다 뺀 책도 있고, 어떤 책은 읽다가 내가 졸아버린 적도 있고, 또 어떤 책은 한 줄 한 줄 아이와 번갈아가면서 읽기도 했다.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아이들 정서에 좋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늘
"이제 글자 다 아니까 너희들끼리 읽어!"
또는 형들한테 대신 읽어주라며 미루곤 했다.
모처럼 우연히 펼쳐진 아이들과의 시간에 나는 객석이 가득 들어찬 무대에 들어선 것 마냥 마음이 들뜬다.
요새 주말에 아이들과 외출하려고 해도 “집에 있고 싶어요” 라며 TV, 게임 등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듯해서 은근히 서운하곤 했는데 어린아이처럼 깔깔대는, 엄마 키를 훅 지나치고 또 엄마 발사이즈를 훌쩍 넘어버린 사춘기 아들의 웃음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놓인다.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모두의 마음이 한껏 나른해지는 시간.
어느 작가가 그랬다. (고수리 작가)
“하루 하나만 기억하면 돼. 모든 걸 다 기억하려고 하면 특별한 하나가 사라지거든”
마지막 장면
'얘야, 이리 오렴, 엄만 널 가장 사랑한단다'
이 부분을 읽는데 덩치 큰 아들이 커다란 어깨를 한껏 좁히며 둥글게 말아 쥐고는 내게 안기려는 몸짓을 취한다.
오늘, 이 한 가지만 기억하자.
나의 하루를 채웠던 많은 일들,
속상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저 그랬던 많은 일들 중에 이 한 가지를 기억하는 거야.
그나저나 막내 아이가 갑자기 마지막 장을 덮으려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엄마! 나 한 권 더 가져올게! "
"아, 이제 그만 "
이미 뒤꽁무니마저 잽싸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글밥 적은 걸로 가져다 줄래? (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