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시어머니의 다짐
며느라, 놀러 가기 참 좋은 날이다.
따뜻하게 잘 잤노?
며느라, 소고기 구워놨다. 밥묵자
너희들끼리 놀다 와라.
쉬어라
누워있어라
신경 쓰지 마라
할 일 없다
더 자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늘 이토록 다정하다. 사실 시댁에서의 날은 여느 날보다 편하다. 어머니께서 삼시세끼 다 차려주시고 늘 혼자 있을 수 있는 나만의 방을 마련해 주시고 식사 때 외에는 나를 거의 찾지 않으신다. 나는 그저 따뜻한 방, 이불속에서 널브러져 시캉스를 즐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시댁에서 책을 서너 권 읽을 수 있으니 집보다 절대적으로 더 나은 환경이다.
심지어 혼자 아침저녁으로
1일 2스벅이 가능할 정도.
곰살맞은 며느리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나인데,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손님 같은 며느리로 대해주셔서...
명절 때면 시댁 사위들이 오는데, 나는 늘 사위분들인 아주버님들과 셋이서 상을 받는다. 다른 상에 앉겠다고 해도 백년손님 사위와 같은 대접 해주시니 괜히 서러움에 눈물 지을 일도 없다. 어머님이 맛있게 차려주시는 손님 상차림을 받으며 앉아있는 것이 늘 송구스럽지만 한사코 앉으라고 하시니 거절하는 것도 어렵다.
옛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만 봐도 미웁다는 속담이 있었던가. 그만큼 어려운 관계고 잘 지내기 쉽지.않은.관계인데 여러모로 신경써주시고 배려해주시니 이런 고부관계니 정말 다행이지 싶다.
우리 집에 가끔 오셔도 일상 패턴은 비슷하다. 처음엔 내 살림 만지시는 게 당황스러웠는데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머니가 오시면 날 나는 모든 살림 폐업이 가능하다. 어머님이 제집처럼 관리해 주시니 약간의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다. 약간의 갈등과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만큼의 소소한 일이어서 훈훈하게 스쳐가는 봄바람 정도라고 해두자.
사실, 완벽할 순 없다. 막내며 외아들인 남편과 어머니는 아주 친밀한 관계인데 둘이 시도 때도 없이 소곤대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단어들의 조합도 그렇고 사투리까지 섞여있는 수다라서 귀 기울여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통역 불가라 그건 애진작 포기. 약간 소외감을 느끼기도,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가끔 남편 보고 참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제삼자인 내가 봐도 어머니랑 남편은 정말 잘 맞는다. 이토록 친밀한 모자지간. 어머니의 맞장구치는 모습은 참 예쁘기까지 하다. 나는 왜 안될까? 나중에 삼 형제가 커서 나한테 이러면 참 이쁘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어쨌거나 이만하면 서로 Win Win.
어머니는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하시는가. 100퍼센트 아들 때문. 다 아들한테 잘하라고, 아들이랑 잘 지내라고... 아들이 최고인, 전부인 그 마음을 알기에 나도 그저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을 날름 받아먹으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늘그막에 난 예비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거의 모든 딸들에게 그리움의 대명사인 친정엄마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비혼주의자가 많은 시대고 훗날에는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니, 내가 시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도 세녀석 중 한 명이라도 결혼하는 경우에나 해당될 것이다.
나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떨까?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왔고 사랑하는 관계로 시작된 것도 아니니 서로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출근한 첫날 같겠지.
오래전부터 마음먹어오기를 -
나중엔 자식들이랑 멀리 살아야지
기대지 말아야지
아들들 독립 잘 시켜야지
둘이 한가정 예쁘게 꾸미고 잘살면 더 바라지 말아야지
가끔 아들이나 따로 만나야지
그러다 혹시라도 며느리가 날 먼저 찾아주고 또 가끔 놀러 와주면 그러면 기쁘게 맞이해야지
귀한 손님처럼......
그나저나 내 새끼 닮은 손주 봐달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앗! 결국엔 바라는 게 있는 거구나
나도 똑같구나
안돼 안돼! 정신 단디 차리고
다시 한번 굳은 다짐!
가족이란 관계는 세상 편한 사이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서로 편할 듯하다. 이게 마흔 중턱을 바라보는 내가 꿈꾸는 바람직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이고 예비시어머니의 굳은 다짐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질질 질척이는 F인 나는
워쩌다 이렇게 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