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아들 견디기
우수수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그 길 끄트머리
오랜만에 걸어서 막내아이 학교 데려다주고 내려오는 길. '하, 이 자식 언제쯤 나타날까' 조마조마해진 나는 시계를 자꾸 보게 된다. 바지런한 둘째, 셋째는 벌써 학교에 갔는데 첫째는 오늘도 지각 느낌이다.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분명 늦을 것 같은데...... 뚤레뚤레 경보로 걷고 있다. 마음 급한 건 나 하나. 팔짱 끼고 째려보며 서있는데 그대로 지나친다. 내 시나리오에는 없던 변수. 눈이 마주치면 '잘하는 짓이다' 한 소리해야지, 마음먹었는데 나를 못 보고 지나치는 아이를 보고 당황한 나는 무색해져 쭈뼛쭈뼛 뒤따른다.
대체 지금 저 아이 머릿속엔 무엇이 있을까?
엄마 못 봤어?
강한 척 한소리를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끓고 있는 국수에 찬물 넣은 듯 한 김 가라앉아있다.
아, 네
힐끗 보고는 그대로 걷는 아들의 대답은 역시나 단답형. 나는 놓칠세라 (물론 놓칠 것도 없는데 ) 잰걸음으로 따라 걷는다.
앗! 운동화가 아닌 크록스다
크록스 신고 학교 가면 어떡해?
늦었는데 왜 안 뛰는 거야.
추운데 잠바는 왜 안 입었어
잔소리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다가, 대답이 시원찮아 다음 잔소리는 삼키고 그저 발을 맞춘다. '말해 뭐 해.'
잠깐이나마 둘이 걷는 시간. 괜히 아들 손잡고 싶어 팔짱을 껴본다. 뿌리치진 않는다. 고마워해야 하나? 아들 어깨가 내 어깨를 넘어섰다.
둘째, 셋째 아이는 잘 모르겠는데 이 녀석 얼굴을 보면 아기 때 얼굴이 겹쳐 보인다. 여드름 몇 개 나있고 거뭇한 콧수염이 눈에 거슬리는 열세 살 얼굴 안에 갓난아이가, 두세 살 아이가 얼핏 보인다. 가끔 화가 나서 버럭 하며 네 얼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입술을 깨물어야 하는 것도 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던 날, 모든 고통 끝에 거짓말처럼 내 품에 처음 안겼을 때 안녕? 제제야? 했던 그 순간의 얼굴도
결혼한 지 1년 반이 지나도 도통 아기가 생기질 않아 출근 전 새벽 난임병원에 다니며 힘겹게 가졌던 큰아이는 임신 내내 불안 불안하게 존재감을 알렸다.
11주,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무언가 왈칵 쏟아졌다. 설마 했는데 하혈이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지는 통에 양도 만만치 않아 아이가 잘못됐겠다 싶었다. 어떻게 온 너인데 이렇게 놓치게 되는가. 택시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그곳에서의 시계는 세상에서 가장 천천히 느린 걸음을 걷고 있었다. 부랴부랴 달려오신 선생님
아직 살아있는데요?
연속적인 기계음, 너의 심장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그렇게 너는 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모든 게 쉽질 않았다. 양수가 새서 입원도 했었고 하혈은 달고 살아서 몇 달을 누워있었다.
‘아기 낳을 진통이 진행 중인데 아프지 않아요? ’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그래프는 오락가락 치솟는 수치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34주에는 그렇게 조산기로 또다시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붙들었다.
36주가 되어 이제 아기를 낳아도 되니 약을 끊어도 되겠다며 퇴원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퇴원했지만 양수가 터져 그 길로 다시 병원으로 컴백,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사랑을 만났다.
너는 이제 사춘기라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 내내 잘 자라주어서 선생님들과 상담할 때 엄마의 어깨뽕을 한껏 높여주었던 너였는데, 내 손길이 최소한만 필요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 아빠의 시선이 동생들에게로 옮겨지자마자 느닷없이 사춘기 이름표를 온몸에 휘두르고 암흑의 아우라를 뿜으며 감정의 불꽃을 빵빵 터뜨린다. 내 모든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며 처음엔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조차 방금 갈아낸 칼처럼 날이 섰다. 제일 많이 읊조렸던 말은
'배은망덕한 ㅅㄲ'
정말 그 말은 절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표현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진심으로 배은망덕했다.
'네가 원하는 것만 얘기해? 내가 원하는 공부는 안 하고? '
'그놈의 게임! '
내 입에선 고작 이런 말들만 녹음해 놓은 듯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너조차도 어쩔 수 없는 너의 마음이란 것을. 정상이 아닌 것 같지만 정상인 마음.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비록 집에서는 말수가 줄어들었으며, 자라나는 마음 한켠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우리는 알아채지 못하는 너만의 애틋한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갈 테지만 말이다.
너의 세계가 궁금하고 또 그 속에 귀를 쫑긋하고 싶고, 발끝이라도 들이밀어 너와 닿고 싶지만 참아보련다.
동굴과는 다르게 터널 끝에 빛이 있다고 했던가. 학교에 들어서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바라건대
우리의 마음이 너에게 닿아 간질거리길...
자녀를 사랑하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
뭐 사달라는 것, 게임 시간 늘려달라는 것 외엔 별말이 없지만, 언젠가 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을 때 그 자리를 사랑으로 지키고 있는 나이길.
너를 사랑하는 것 또한 내 할 일이니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