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도서관
퇴근 후 띠리리릭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슬리퍼가 하나 날아온다.
나의 번뜩이는 호랑이 눈을 본 둘째 녀석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목소리
앗 엄마 안녕하세요?
으응? 안녕하세요?
어지간히도 많이 놀랐나 보다. ‘안녕하세요’라니. 다다다닥 무엇인가를 수습하는 듯한 소리. 우리 집 사내 녀석들은 이렇게 뛰고 던지고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후유…… 못살아’ 홍해를 가르듯 아이들이 던져놓은 책가방, 학원 가방, 실내화 가방을 휘휘 발로 밀어내며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막내 아이의 우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온다. ‘엄마~~~ 형아가 나한테….’. 어쩌고 저쩌고 세상 가장 억울한 목소리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내 귀에 담기질 않는다. ‘그만해’ 사실 듣기 싫었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겠지. 어물쩍 넘기고 싶어 형들을 불러 다그친다. 형들도 질세라 ‘막냉이가 먼저….’ 나에게 와닿기도 전에 자동 음소거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출근이 다시 시작됐다.
거기서 나는 끝내고 싶었다. 사직서를 던져버리고 싶은 나의 두 번째 직장, 저녁의 우리 집
드라마처럼 그 사직서 받아서 서랍에 넣어 놓은 뒤 ‘한 번만 더 생각해 봐’라고 말할 사람도 없거니와
영원히 수리되지 않을 나의 사직서라는 것도 알고 있고 잠깐 도망가봤자 그저 아주 평범한 외출, 병가, 조퇴, 연가 수준이기에 오늘은 ‘무단결근’ 아니, ‘가출’이라는 모양새를 당당히 보여주고 싶다.
나는 정말, 오늘, 기어코! 집을 나가버리고 말 거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간식 쓰레기들,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 한 사람당 열개씩 정리하라고 시키고 나니 벌써 진이 빠진다. 사실 나는 집안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시키는 것도 목 아프고 힘들다. 내 할 도리는 해야 하므로 저녁밥 대충 차려주고는 집을 나서기로 작정한다.
손에 닿는 것들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나의 심기를 드러냈고 옆집 사람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티 내며 집을 나선다. 막내 아이가 맨발로 따라나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는 ‘엄마 어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데 마음이 아주 살짝 동요하였으나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는 돌아선다.
몰라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사실 딱히 어디라고 말할 것도 없다.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느 곳이라야 평안한 은신처가 될 수 있을까? 무작정 숲길 쪽을 향한다. 아이들 등하굣길이기도 하면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숲길이다. 그리고 도서관 가는 길이기도 하다.
어둑어둑한 길을 지나 그 길 끝엔 얕은 빛이 새어 나오는 도서관이 덩그마니 있다.
아이들 놓고 나서니 조마조마해야 하는데 왜 무엇 때문에 발걸음이 이다지도 가벼울까? 일순간 변해버린 내 마음에 나도 놀란다. 심지어 설레기까지 한다. 종합자료실은 10시까지 하니까 일단 가보자.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사뭇 진지하다. 비밀의 화원에 들어선 것처럼.
옛날의 취준생처럼 작정하고 공부할 건 아니므로 내가 좋아하는 시집코너와 수필 코너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혀끝에 굴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들이 내 마음을 콩닥이게 한다.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는 어린이열람실에 들락날락했는데, 나를 위한 도서관은 대체 얼마만이야. 오늘 밤은 아이들 뒤치다꺼리 없이 그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사락사락 책 한 장 넘기는 소리도 민망한 눈치형 인간인 나는 도서관 로비 책상에 자리를 잡는다. 오가는 사람들도 많고 편하게 책을 읽는 사람들, 수학문제 푸는 중고등학생들의 낄낄 거리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내 시간 속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책 속으로 오롯이 빠져들고야 마는 그런 마법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따라 들어간 조그만 굴처럼 말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의 도서관이었다. -빌 게이츠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어린이 자료실에서 아이들 책 읽어주는 수업을, 조금 큰 이후에는 인형극, 그림자극, 마술, 클래식 공연들, 헤아리기도 힘든 갖가지 체험들, 너무나 즐거웠던 책 소풍….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머물렀었지. 아이들에게 어느 날은 공부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테고, 귀찮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가끔
‘엄마! 이런 수업 이제 그만 신청해 주세요’라고 푸념을 늘어놓아서 극성 엄마가 된 것 같아 아들들 눈치 보느라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그저 손바닥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스치는 시간들일 수 있겠지만 그 시절의 내가 그 시절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의 도서관’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왔다. 물론 화가 나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낮시간이 아닌,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 나의 작은 가출, 공기가 꽉 차버린 풍선처럼 한숨만 불어넣어도 빵 터져버릴 것 같이 부풀어 오르던 내가 작은 숨구멍하나 낼 수 있었던 순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마음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줄 수 있었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그날 나만의 단편.
열 시, 도서관이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씩씩대며 올라섰던 그 길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나의 발자국이 어둠 속에 차분히 가라앉아 내 발걸음을 순하게 받쳐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