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 발령, 완벽한 일상이 깨지던 순간
2022년 1월 자가로 거주하던 30평짜리 아파트가 수익을 내서 40평으로 이사를 했다. 남들 다 하는 부동산 투자라지만 소중한 우리의 첫 내 집마련이 성공적이었기에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첫 집을 마련하면서 자금이 모자라 국평이라 불리는 평수보다 작은 30평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입주하던 날 남편과 두 눈 부릅뜨며 결의를 다졌다. 다음집은 꼭 큰 집으로 이사하자고. 그 꿈이 5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그 해 3월에는 이사하면서 발생한 수익금의 일부로 우리의 로망이었던 꿈의 캠핑카를 장만했다. 신혼 때부터 시작한 12년 차 캠퍼로서 40대에는 캠핑을 그만두던지 캠핑카를 사자고 얘기했었다. 무더운 여름 땀 뻘뻘 흘리며 텐트 칠 때 이 짓 더 이상은 힘들다고 하던 얘기였지만 이렇게 실현될 줄은 몰랐다. 월드컵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우리가 경험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5월에는 1년 이상 대기를 걸어놨던 고급 SUV 신차가 출고되었다. 이 또한 부동산 수익금의 일부로 현금 완납을 하며 우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좀 멋진데"
스무 살에 만난 대학동기인 동갑내기 우리 부부에게는 뭔지 모를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한 부심이 있었다. 마흔이 되면 뭔가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는,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서로 같았다.
우리 둘 다 만 40세 생일이 지나지 않았기에 우리의 목표치보다 먼저 결승점에 골인한 기분이었다.
우리에겐 한글 읽기 쓰기도 못한 채 입학한 어리바리했던 코로나 신입생 초딩 아들이 있다. 이 귀요미도 3학년이 되니 단원평가 만점을 과목별로 빵빵 터뜨리지 않겠는가. 축 쳐져있던 애미에게 어깨뽕을 넣어주니 이로써 한국시리즈에서 3회 말에 콜드게임으로 완승하는 기분이었다.
5월의 햇살이 빛나던 어린이날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우아하게 라면으로 브런치를 때리고 캠핑카에 이것저것 대충 실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부모님의 텃밭에 도착했다. 온전히 우리 세 식구만의 캠핑장에서 더운 낮시간에는 캠핑카 에어컨을 틀고 영화를 봤고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을 쐬며 캠핑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난 모든 게 좋아, 안정적이야, 행복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벽한 행복에 가까이 가 있었다. 캔맥주 따는 소리마저도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경쾌했던, 청춘 드라마처럼 청량하고 설레던 그런 날이었다. 그간 맘고생했던 모든 것들을 이렇게 보상받는 듯했다. 이젠 나도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아야지 다짐하는 나 자신이 멋져서 어깨가 귓불까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성실함을 치켜세우며 우리 세 식구 더 단단한 행복을 만들 거라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시간이었다. 매일이 꿈같이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즈음에는 약간의 힘듦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랬던 우리 세 식구의 삶은 8월 미국 주재원 발령으로 한방에 깨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