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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스 Nov 07. 2024

나야, 갈빗살

립아이만이 정답이 아니었다


미국 시골에 산지 이제 2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에는 한신포차, 투다리와 역전할맥 등을 그리워하며 살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이제는 내가 있는 이곳을 '아줌마맥주 집'이라 생각하며 금요일 밤마다 우리 집은 작은 영업장으로 변신하기에 이르렀다. 단골손님은 가족 없이 홀로 미국땅에 나와있는 미혼의 직원들이다. 그들은 남편을 책임님으로, 나를 대장님으로 부르며 우리와 불금을 함께하는 소중한 새로운 패밀리가 되었다. 


지난주 금요일, 불금 영업을 위해 설레어하며 집을 청소하고 있는데 평소 전화는커녕 카톡도 안 하는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무슨 일이야?"

"오늘 상무님이 법카 주셨어. 우리 직원들 먹이는 건데 오늘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래."

"소고기 사와 소고기. 스테이크 먹자. 등급 높은 걸로 새우살 도톰하게 많은 립아이로."


'법카' 이 얼마나 설레는 단어인가. 이 단어 하나에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은 한마디로 '매출 없는 영업장'이나 다름없으니까. 늘 회사 동료들이 와도 우리 가족이 먹는 일상적인 식사에 그저 숟가락 몇 개 더 얹는 정도의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 끼를 나눴다. 게스트들은 항상 빈손으로 오지 않았고 아이 간식이나 음료 등을 챙겨 오며 우린 그렇게 보이지 않는 룰에 의해 알뜰하게 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높은 분께서 법카를 하사하신다니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잖아. 어머, 이건 맘껏 누려야 해.


'제군들, 준비되었는가. 오늘이 그날이다.'


우린 마치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섬멸하려 학익진 전법을 준비하는 이순신 장군이 된 듯 비장한 마음으로 오늘을 불태우기로 했다.




"책임님, 프라임 등급 립아이가 없어요. 어쩌죠? 몇 팩 있는데 상태가 안 좋고 아랫 등급이라도 살까요?"

"그래? 그럼 너 먹고 싶은 거 알아서 사와."


이게 뭡니까. 이 남자들의 이 의미 없는 통화 내용에 화가 치밀에 올랐다. 오늘 우리의 메뉴는 미국 코스트코 프라임 등급의 립아이 스테이크였지 않는가. 그 주인공의 불참 소식에 저렇게 쿨할 수 있다고? 남편은 흥분과 실망과 분노에 찬 나를 진정시켰다.


"얘 믿어봐. 음식도 잘하고 센스 있는 애니깐. 알아서 잘 사 올 거야."


그렇긴 했다. 이 S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취 경력이 어마어마한 요리왕인지라 가끔 내게 먹어보라고 가져오는 음식들을 보면 메밀국수, 양념게장 등 솜씨가 굉장했다.

S군을 믿어보기로 하고 마음을 진정하고자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삼십 분 후에 문이 열리며 S군은 고기 다섯 팩과 양주에 와인에 음료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나타났다.


"고기 뭐 사 왔어? 살 거 있었어? 나 걱정 많이 하고 있었다. 고기 좀 봐봐."

"대장님, 립아이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얘가 딱 저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야, 갈빗살


S군은 갈빗살이 자길 가져가라며 속삭였다고. 오늘은 이걸 먹어야 하는 날이라며 자신 있게 내놓았다.




집에 와서 숯불을 준비하던 남편과 나는 선홍빛의 고상한 자태를 풍기며 유혹하는 그 갈빗살을 보며 만족했다. 심지어 가격도 착하다니. 지금까지 새우살 붙은 립아이만 고집하던 우리는 갈빗살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 아니냐며 설레어했다.

 

삼십여 분 달궈진 숯불이 잘 펴진 야외 그릴에 갈빗살이 올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적당히 잘 익은 갈빗살을 한 입 먹는 순간 안에 꽉 채워진 육즙과 고소한 고기 겉면이 어우러지는 환상의 컬래버레이션에 말을 못이었다. 갈빗살은 사랑이었다. 왜 이 지독한 사랑을 우린 지금까지 몰랐었던 것인가. 


흑백요리사에서 여경래 셰프는 이런 말을 하셨다.


맛의 기준은 손님입니다.


업장의 호스트로서, 우리 패밀리의 대장으로서 게스트들에게 오늘의 메뉴 선정과 육질, 고기의 익힘 정도에 대해 물어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록 비영리 단체처럼 수익률 없이 운영되는 업장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나의 소중한 손님들이니까. 


"대장님, 이거예요 이거. 우리 이제 립아이에 집착하지 말아요."


그래, 좋았어. 그날의 만족스러운 우리의 식사에 오랜만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적지 않은 연봉을 받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미국 물가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아끼지 않고 살 수 없으니. 항상 삼겹살만 먹여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메뉴가 생겨서 기분이 가 좋았다. 




한여름에 백 야드 그릴에서 고기 굽느라 고생했던 게스트들이 생각났다. 아직도 환율 생각에 달러를 원화로 계산하며 쇼핑을 하곤 하는데. Indoor Grill이 180불이면 25만 원? 살짝 고민하긴 했지만 과감히 질렀다. 우리의 행복한 불금을 위해 내가 대장님인데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얘들아, 우리 집에 그릴 새로 샀다. 여기에 삼겹살도 굽고 갈빗살도 굽고 다 굽자."


미국 생활이 별거 있나 싶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웃을 수 있는 순간이 가장 큰 행복이다. 잘 먹고, 마음도 몸도 건강하게 지낸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외롭고 힘든 외국인 노동자 살이지만 이런 소소한 행복이 있음에 감사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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