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쟁이는 이게 문제다. 계획에 조금이라도 마뜩잖은 부분이 있으면 손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완벽한 계획이다 싶으면 한치의 여유도 참을 수 없다. 몸을 움직여 바로 실행해 버리고는 완벽한 계획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계획도 완벽했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계획대로 장바구니 카트에 프린터를 실어 나갈까 하다가 카트를 꺼내기가 귀찮다. 아직 30대인 줄 순간 착각이라도 했는지 털신에 발을 집어넣고 두 팔로 번쩍 프린터를 든다. 가뿐해서 기분도 좋고 발걸음도 가볍다. 신나게 아파트 공동 현관을 빠져나오는데 너무 가벼웠나 보다. 겨울바람에 흔들릴 몸이 아닌데 왜 이러나 싶은 순간 기우뚱. 대리석 계단과 털신과의 마찰력이 힘을 잃었다.
퍽. 툭.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프린터기는 결코 만날 일 없어야 할 시멘트 바닥과의 만남을 성사하고 있었다. 나는 발목이 꺾인채 코 박고 있었고.
"괜찮으세요? 이거 버리시는 거예요?"
하필 또 이 처참한 광경을 강아지와 함께 뒤따라 나오시던 아저씨가 목격하고야 만다.
발에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 몰려와 울부짖고 싶지만 내 입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괜찮아요. 버릴 거예요."라고 주절이고 있네. 오로지 정신력으로 프린터를 다시 챙겨 들고 발의 통증과는 상관없이 다시 걸었다. 아니 왼 발을 끌며 걷고 있었다. 체감 상 한 108개인 듯 한 돌계단을 내려가 행정복지센터 지하에 있는 폐가전수거함에 이 고물덩어리를 떨어뜨리고 나니 그때서야 통증이 심해진다. 혼자 울기는 싫고 그래도 이 순간에 전화해서 울고 싶은 사람은 둔하긴 해도 내 남편이다. 나 넘어져서 아프다고 징징징.
작가모임을 못 갈 수도 있다는 것과 당장 드러눕고 싶은데 남은 하루동안 걸을 일이 더 많이 남았다는 현실에 아픈 것보다 짜증이 먼저 났다. 계획쟁이는 이것도 문제이다. 계획이 어긋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완벽한 계획일수록 플랜 B는 없다. 그렇게 재워둔 만능소보로는 잊혔다.
다음날 연차를 낸 남편과 병원에 갔다가 다리에 보조대를 달고 나왔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지만 발등 인대를 다쳤고 보행을 최대한 하지 말고 누워있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작가모임은 다음을 기약하자고 지역방에 알리고 러닝이 너무 좋다고 설레발쳤던 운동방에도 잠시만 안녕을 고했다. 다시 일정들을 정리하고 나니 만능소보로가 생각이 나네. 하필 남편이 볼일 있다고 나간 그때. 기다리지 못하고 믹서기를 꺼내 당근과 우엉을 갈고 만능소보로를 볶기 시작했다. 싱크대에 몸을 반쯤 기대고는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볶고 있는데.
다 볶은 만능소보로. 식으면 납작하게 얼려두고 여기저기 넣으면 된다
당근
알림이 왔다. 피아노 나눔 아저씨께서 토요일 말고 오늘이나 내일 오라고 한다. 바로 그때 남편이 들어왔고 하필 오늘 시험이 끝나서 일찍 하교한 장남이 들어왔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마치 짠 것처럼 무섭게 맞아떨어지는 우연이 인생의 한 순간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렇게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던 피아노는 목요일에 우리와 만났고 생각보다 더 좋아 보이는 피아노 상태에 감격했다. 그날 저녁 만능소보로에 계란 프라이 하나 얹어 고추장만 넣고 비빈 밥은 맛있었고 장남은 계획보다 3일이나 먼저 도레미파를 눌러 보았다. 우리 막둥이는 전자피아노에서 나오는 동물 소리에 더 환호했지만.
큰애 시험이 끝나기 바로 전날 내가 발을 다쳐서 다음날 남편이 연차를 냈고 그 덕에 피아노를 빨리 가져왔다. 다친 다리 때문에 아니고 덕분에 피아노를 빨리 만났고 토요일에 우리 막둥이는 아빠와의 도서관 데이트를 즐겼으며 나는 편안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변수가 생긴 순간을 짜증으로만 채울 뻔했는데 소름 돋는 우연으로 한번 더 웃을 수 있는 게 인생인가 보다. 또 더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함으로 채울 수 있었다.
번외 1. 피아노 뒷 이야기
우리 아이가 음만 듣고 피아노를 쳐요. 절대음감인가 봐요. 절대 음감은 아니지만 지독한 연습벌레예요. 하고자 하는 건 이루어내려고 엄청 연습하더니 결국 해내네요. 솔직히 이런 후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절대음감도 연습벌레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인생 첫 시험이 끝난 14세의 머릿속에는 당당하게 놀 궁리가 99%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놀 의지를 꺾지는 못했나 보다. 캐논변주곡으로 시작하는 악동뮤지션의 '오랜 날 오랜 밤'을 선곡했다고 해서 쉬운 악보를 구해 일일이 계이름을 적어놓고 연습해서 리듬을 알려주는 일까지 다 내 몫이 돼버렸는데. 이게 재미있네. 아들이 아니라 내가 유튜브로 피아노 왕초보 독학으로 배우기를 보며 연습하고 있고 내가 솔 미파솔 미파솔을 뚱땅거리고 있다. 물론 오른손만. 일부러 아들 있을 때 하니 자기도 연습한다고 같이 뚱땅거리고 있는 모습이 내가 널 가르칠 게 있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뇌가 아직은 말랑말랑한지 익히는 속도가 나보다 빠른 게 신기하면서도 질투도 나지만. 우리 아들 아직 완곡은 못 치지만 '솔 미파솔 미파솔 솔라시도레미파~ 미 도레미 미파솔라솔파솔~' 여기는 누르는거 아니고 기가 막히게 친다.
번외 2. 연재의 압박
또 입방정이다. 1편을 써놓고 바로 다음날 2편을 올리겠다고 기다려달라고 해놓고선 약속을 못 지켰다. 애들 보내놓고 다다다 쓰려고 했는데 둘째가 목이 아프다고 병가를 요청한다. 아프다는데 별 수 있나. 다리 아픈 엄마를 대신에 막둥이 손을 잡고 같이 등원해 주고 같이 병원 가서 진료받고 엄마 물리치료받는 거 기다려주고 도서관 데이트도 했다. 빨리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간만에 둘째와만의 시간도 놓칠 수 없다. 괜히 아픈 척 나보다 작은 아이한테 기대니 평소처럼 휙 달아나지 못하고 가만히 손잡고 어깨를 내어준다. 도서관에서 책도 잔뜩 빌려서 오니 이 또한 계획에는 없었지만 밤에 폰으로 다다다 초고를 써서 눈이 피곤하지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엄마 글 써야 하니 학교 가라.
"What seems to us as bitter trials are often blessings in disgu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