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라미 Dec 03. 2024

어차피 노스페이스는 안 사줄 거잖아

우리 집 유망주의 늦은 패딩 구입기

 제목의 저 문장이 대본 속 한 대사였다면 지문에는 이런 지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낙담하거나 실망한 말투가 아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담담하게)


올 한 해 급성장기로 10cm가 커버린 탓에 분명 작년에 사준 패딩이 팔은 짧아지고 어깨는 비좁아졌다. 추워서 떨면 떨었지 팔 짧은 패딩은 못 입겠다면서 갑자기 찾아온 영하의 날씨, 117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에도 기모후드집업 하나로 버티던 대한의 남아가 내 아들 되시겠다. 내가 추운 것보다 자식 추운 것이 더 걱정되는 거 보니 지지고 볶고 싸워대도 엄마는 맞나 보다. 친구들은 뭐 입더냐. 언제 시간 되냐. 패딩 좀 사러 가자고. 사춘기 아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질척거림을 시전 하다가 들은 쿨한 한마디가 '어차피 노스페이스는 안 사줄 거잖아.' 노스페이스? 브랜드 명이라고는 아디다스, 나이키 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하긴 내 아들이 바보가 아니지. 영어를 몇 년을 공부했는데 여기저기 눈만 돌리면 보이는 그 단어를 모를 리가.




 우리 가족의 육아 원칙 중 하나는 약간의 결핍을 경험하게 키우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면 충분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보고 부모를 설득도 해보는 그 과정이 아이들에게 중요하다 생각한다. 부족하게 키우진 않았지만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가르치려 노력했고 나이에 비해 과하게 비싸거나 단지 유행에 휩쓸렸다고 판단되면 안 되는 건 안된다 가르치긴 했다. 많은 친구들이 가슴팍과 등짝에 저 브랜드 로고를 달았어도 비싸다는 걸 아는 아이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내가 입을 옷은 아니라고 여기고 아예 선택지에 넣어놓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 브랜드는 아니어도 뭐라도 걸치고는 다녀야 하지 않겠니? 토요일에 가. 토요일.

드디어 답을 들었다. 토요일을 기다리며 유심히 다른 아이들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관심 가지고 보니 보였다. 눈이 얼어붙는다고 조심하라는 재난 문자가 연달아 울리던 그날에도 얇은 후드 점퍼만 입고 다니는 중학생이 우리 아들뿐이 아니라는 걸. 뭐라도 입기라도 했음 다행이지. 체육복만 덜렁 입고 다니는 애들은 왜 눈에 뜨이는지. 아휴. 너네 집 어머님 속도 까맣다 못해 그을리고 그을려 허애 졌겠구나.  그나마 뭐라도 걸친 아이들을 보니 '북쪽 얼굴'이 많이 보이긴 한다.



드디어 토요일.

오빠 옷 사면서 자기 옷도 하나만 사달라는 꼬맹이 손을 잡고 아웃렛으로 입성했다. 일단 주니어 브랜드에서 기모 후드티와 바지를 몇 벌 고른다. 날이 갈수록 옷 보는 눈도 높아져서 로고가 큰 지 작은지 어차피 검 회 흰 중에 고를 거면서 고르고 고르고 까다로우시다. 그래도 옷을 입어보고 나올 때마다 길쭉길쭉한 다리에 늘씬한 몸은 입는 옷마다 어울리고 난리인지 아이가 아들이에요라고 마음의 소리가 메아리치고 입꼬리는 승천한다. 그 집에서도 패딩이 디피되어 있는 것을 봤지만 철판 한 장 얼굴에 덮고 계산을 하면서 슬쩍 물어본다 "노스페이스는 몇 층이에요?"


 노스페이스가 있다는 그 층으로 도착하자마자 매장이 보인다. 그래도 아들은 다른 매장을 서성이며 패딩 몇 개를 입어본다. 그중 한 브랜드의 패딩을 입어보더니 이게 맘에 든단다. 브랜드는 다르지만 모양은 최대한 비슷한 것을 찾은 것 같다. 바람을 넣었다. 노스페이스 가서 한번 입어나 보자고. 이쯤 되면 애가 입고싶은건지 내가 입히고 싶은건지 헷갈린다.

"엄마 거기 되게 비싸."라고 말하면서도 입었던 옷을 잽싸게 벗고는 매장을 나선다. 목표 지점으로 가니 점원분께서는 아주 능숙하게 패딩 하나를 골라오신다. 중학생들은 군중심리의 노예들 인 것을 아시는 듯 '이거 중학생들이 제일 많이 입어요.' 라고 쐐기를 박으시면서.

저 말 한마디로 이미 결정이 났다. 역시나 입어보니 이게 편하단다. 편한 게 아니라 친구들이랑 똑같아서 좋은 것이겠지. 지금 입은 사이즈가 딱 예쁜데 도치 엄마에서 현실 엄마로 돌아와야 한다.

"한 치수 큰 것도 입어보자"

요즘 오버핏이 유행이잖아. 우리 아들은 금방 금방 크더라. 내년까지 입어야 한다는 말을 예쁘게도 포장했다.

결국 한 치수 큰 노스페이스 패딩을 무이자 할부 찬스를 써서 결제하고 품에 안겨드렸다.

이 착하고 눈치 빠른 녀석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내려놓고는 말한다. 내년까지 입고 OO이(2살 터울 동생)도 입고 4년 입으면 괜찮지 않냐는 논리로 엄마의 헛헛한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러면 좋겠지만은 동생은 무슨 죄니?

"우리 집에서 제일 비싼 패딩이다." 쿨하지 못한 엄마는 한마디 덧붙인다.

"감사합니다. 근데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유망주잖아. 유망주에 투자했다고 생각해 줘."

유망주? 오호. 사춘기 꼴통의 새로운 해석이네. 그렇지 넌 우리 집 유망주지. 엄마 기대 좀 해도 되겠니? 당장 10일 남은 기말고사부터.

유망주께서는 당당히 북쪽얼굴을 걸치시고 모아나 2를 관람하고 문화생활 충만한 주말을 보내었다.


 그나저나 엄마와 오빠의 심오한 고뇌와 밀당을 알 리 없는 5세는 어쩐 일 인지 오라버니의 쇼핑 활동을 얌전히 관전 하시나 싶었다. 이젠 자기 차례라며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입어보고 마음에 드네 안 드네 아까 그 가게로 다시 가보자 하시며 부잣집 아가씨 놀이를 시작했다. 이 아이의 결핍은 또 어찌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