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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너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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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4

조금 늦어 봤자

여유로움에 대한 이야기

"엄마, 엄마는 왜 여유로워요?"

당황한 내가

"응?"

이라고 되묻자 아들은,

"엄마 지금 비타민 마시면서 고구마 쩝쩝거리면서 책 보는 게 여유로워 보여요."

"아. 그래?"

거실 테이블에 앉아 문제집을 풀던 아들이 말했다. 어제저녁, 거실에서의 일이다. 거실에는 큰 테이블이 있어 우리는 이곳에서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며 밥도 먹는다. 거실 중앙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은 우리 가족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작은 아들과 대각선으로 앉아 그저 저녁 때울 요량으로(이미 아들은 저녁을 먹었다.) 저번에 삶아둔 고구마와 냉장고에 있던 비타민 음료를 꺼내 먹는 중이었다. 물론 책과 함께. 그 모습을 본 아들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여유로워 보인다,라고 말했다.


아들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엇이 여유로워 보였을까. 고구마를 먹으며 비타민 음료를 마시는 것이었을까, 책을 보는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자기는 문제집을 풀려고 애쓰는 중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 말의 의중을 알 수는 없지만 아들의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단언컨대 내가 보기에, 아들의 모습 또한 그리 여유로울 수가 없다. 아들의 모습을 보자.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발로 의자를 왔다 갔다 건들건들거리고 있다. 하물며 왼손으로는 숟가락으로 연시를 떠먹으며 오른손으로는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온 발과 손에서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고 있다. 어찌 공부를 하고 있단 말인가.


"너도 지금 여유로워 보여."

내가 말하자 아들이 무슨 뜻이냐며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렇다. 아들은 게임 30분을 하기 위해 신속히 풀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아들이 의자를 흔들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척하면서도 그의 마음에는 조급함과 게임에 대한 갈망이 섞여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너도 지금 의자 흔들거리면서 연시를 먹으며 공부하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이는 걸?"

짐짓 아들의 마음을 모르는 척 웃으면서 말하자

"그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긋 웃는다.

"그럼 우리 둘 다 여유로운 거네요, 그쵸 엄마?"


이 저녁, 강 너머 해가 저물어 깜깜해지는 이 시간.

우리는 거실에서 여유롭게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 이게 여유로움이구나.


▲  강 너머 해 지는 시간


주부이자 엄마로서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청소하기. 요리하기. 운동하기. 사소하게 커피 사서 마시기 등. 특별할 것도 없다. 하물며 공들인 시간도 아주 짧다. 손이 빨라서일까, 익숙한 공간이기에 그럴까. 집안일에 깔끔 떠는 습관이라 해 두고. 이 모든 것은 오전 10시면 끝난다. 그 이후로 출근을 한다던가, 정해진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옆에서 감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체크리스트를 작성해서 체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설정해 준 데드라인 마냥 나는 철저하게 이 시간을 지킨다.


조금 늦으면 어때.

5분이면 어떻고 10분이면 어떠리. 그 시간 안에만 해내면 되지 않느냐,라는 것이 아들의 주장이다. 늘 하교 후 나와 언쟁을 벌이는 부분이다.

시계를 보라.

2시 15분이 지났는가. 이미 2시 30분이 되었다.

2시 30분이 되려면 15분이 남았는가. 이미 2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시간을 보면서 미리 앞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는가. 일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소요시간을 확보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에 이미, 우리 집 거실 시계는 정확한 시간보다 5분이 빠르다. 또한 늘 차고 있는 손목시계조차도 5분이 빠르다. 아, 절대 놓칠 수 없는 1분의 시간이여.


▲ 거실 벽에 걸린 5분 빠른 우리 집 시계


조금 늦으면 어때. 

조금 늦을 수 있다. 변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는 미루지 못할 조급함이 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8시가 되면 일기를 쓰고 9시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버릇이 중고등학생 때에도 이어져, 이제는 공부를 늦게까지 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부모님 말씀에 조금 시간을 늘려 10시까지는 버텼다. 시간이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어서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점호시간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남들이 그때까지 밖에서 술을 마시든 공부를 하든 연애를 하든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시간에 이미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물며 수업이 4시에 끝나서도 바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조급함과 부지런함이었다.  


밀물 때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파도가 조금씩 밀려 나와 금세 모래사장을 덮어버린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금방 모래사장 위의 운동화가 젖어버리는 것처럼. 이렇게 일상에서의 조급함이 조금씩 밀려 나와 나의 몸과 마음을 뒤덮어버린다. 그래서 그 안에서 여유는 없다. 모든 것이 시작된 이상, 이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순식간에 해결해야 한다. 늘 시간에 쫓기듯이.




이리 바삐 사는 걸까. 아니, 이리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릴 때의 습관이 지금의 나라고 해도 무관하다. 단지 습관이어서 그런 걸까.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직장을 내려놓고 아이를 가정에서 키우게 되면서 주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런데 그 주부라는 것이 할 일이 많아 바쁘면서도 또 엄청 느긋하다. 시간이 부족하면서도 시간이 모자라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워킹맘이라 불리는 틈에 들어서면 난 그저 시간이 많고 한가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주부로서 누리는 집안에서의 여유로운 시간들이 상대적으로 바쁘게 보이길 바랐나. 나도 집에서 이만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나. 내가 이렇게 집에서 쓸모없이 늙어 가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나.


여유로움이 마치 게으른 자들에게 만 있는 속성인 거 마냥, 나는 그리도 조급함의 부지런함을 떨었나 보다. 그래서 조급함을 나의 좁은 관계, 남편과 아이들에게 몰두하여 한정된 관계에서 발산했나 보다. 가족이란 틀에서 규칙적이지만 답답한 감옥 같은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혼자 애쓰며.


불행히도 조급함의 마음과 행동을 가지고 살면서도 난.

끝까지 여유로움을 풍기려고 했다. 여유로운 척했다. 그래서 누군가 '참 윤슬은 여유로워 보여.'라고 말할 때마다 내심 뿌듯함과 자만심을 치켜세웠다. 난 이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을 가졌다고 내색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아등바등 헐떡이면서 말이다.

여유로움과 조급함. 게으름과 부지런함. 아직 이 이질감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여유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다. 잠깐 멈춰 서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들 말처럼 고구마를 쩝쩝 거리며 책을 보는 것이 여유롭고 부지런한 것임을. 가만히 소파에 드러누워 숨만 쉬는 것도 조급하고(시간에 맞춰) 게으른 것임을.


이제는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시간의 흐름에 맞춰 여유를 부려볼까 한다. 그러다 보면 점차

여유로움의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 에이스 과자의,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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