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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 여행자 Nov 04. 2024

주름 업고 튀어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

 "엥? 엄마, 젊어. 젊어 보이지 않아?"

 얼굴이 불타오르며 눈이 커진 나를 보며 작은 아들은 해맑게 웃고 있다.

 "기쁨이 친구 엄마들 중에서도 엄마는 나이가 젊은 편이야."

 "아, 그래요? 엄마 늙어 보이는데."

 어쩜 저리 태연스러운지. 옆에 있던 큰 아들은 풉, 하고 웃고. 남편은 아니야,라고 한마디 거들뿐이다.


 주말 저녁에 다 같이 모여 앉아 야구를 시청하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야구 선수 나이를 얘기하면서, 그들이 베테랑이라 나이 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마아빠 보다 어리다,라고 말하고 있던 타이밍이다. 그런데 대뜸 작은 아들이 나보고 늙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Oh. 이렇게 직설적인 아들이라니. 정말 놀랍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의 눈빛을 가지고서 말할 수 있는가.

 비록 응원하는 팀의 좋아하는 야구선수지만,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 나만의 착각인가.

 아. 사실은 늙었는데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실제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건가.


▲  말라버린 귤껍질


 거울 앞에 선다.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본다. 피부과에 돈을 투자한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홈케어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토너, 크림이면 끝인 나의 피부관리는 20대부터 늘 그래왔다. 외모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라고 나 자신을 치부해 본다.

 무거운 눈덩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축 처진 쌍꺼풀(쌍꺼풀 수술을 받았었냐 할 정도로 짙은 쌍꺼풀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눈 밑 약간의 다크서클. 그리고 깊이 파인 팔자 주름. 그 어느 것 하나 탱탱하지 않은 피부. 기미와 여드름까지.

 게다가 흔한 매니큐어조차 없는 밋밋한 손은, 푸석푸석하고 쭈글쭈글한 귤이다. 말라버린 귤껍질마냥.


 아. 슬픔이 파도치듯 몰려온다. 언제는 거울 보는 게 즐겁고 내 미모에 감탄한 적 있었냐만은, 아들에게 직접 '늙음'에 대해 들은 건 가히 충격적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친정 엄마는 손수 만든 흑설탕을 얼굴에 바르며 내게도 바르라고 말했지. 거부하는 날 보며, 지금 관리 안 하면 금방 늙어, 주름이라도 신경 써,라고 했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애써 머리에 난 새치를 감춰보며.

 



 늙어가는 것, 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 윤미. 그 친구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 늘 교복바지를 입고 다녔다. 여고에서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다닌다는 것은, 그에게 어떠한 불편함의 감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윤미는 미술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마다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건 지우개 조각하기. 지우개 뒷면에 이름을 새기고, 4B연필을 깎는 작은 칼로 조각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우개에 사인펜으로 색칠하여 종이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낙관처럼. 아이디어뿐만이 아니라 실력도 좋았다.

한 번은 지우개를 내밀며 이름을 파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지우개를 파던 친구에게 불현듯, 나는 서른 살까지만 살 거야,라고 했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그 친구에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망 속에 사는 나와는 달리, 교복바지를 입고서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윤미의 모습을 보고 속내를 꺼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윤미는 말했다.

"나는 100살 넘어서도 더 살 거야. 나이 들어 흰머리에 비녀를 꽂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림 그리며 기타 치며 그렇게 살고 싶어."


 와.

윤미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건 뭐지.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게다가 꼬부랑 할머니. 흰머리에 비녀를 꽂고 싶다니. 세상에나.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서도 100세 이상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니.

더욱이 뭔가를 하고 싶다니.

.

 다만.

멀쩡한 내 다리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이 듦에 대하여.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는 친구여.

지금은 어디선가. 기타 치고 그림 그리며.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있겠지.


 감사하게도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육아하면서 나이 듦에 대하여 점차 잊었다. 그저 아이들이 몇 개월인지, 몇 살인지를 기억할 뿐 내 나이는 저 멀리 가버렸다. 사실 누군가 내 나이를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래도 동네 놀이터에 나가면, 아이 친구 엄마들 중 젊은 나이에 속했다. 그때마다 나의 젊음이 어찌나 기뻤던지. 그러나 젊음의 행진, 이라 여겼던 것도 잠시. 엘리베이터를 타면 이웃들은, 동갑내기 남편보다 나를 더 나이 많게 보았고(그때마다 남편은 우쭐했다.). 목욕탕, 마트를 가도 나는 일개 '아줌마'였다. 아줌마도 익숙지 않은 이 시점에, 늙어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인정하기 싫다.


▲  향기롭고 싱그러운 꽃다발.


 내 나이가 어때서.

20대 때는 텔레비전 광고에 할머니, 할아버지 모델 분들이 나와서 '내 마음은 청춘이에요.'라고 멘트 할 때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청춘이어야 하는가. 그저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일 뿐인데.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공식적인 나이는 있을지언정, 나의 마음은 아직도 20대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여겼던 그때. 그래서 이 시대에 발 빠르게 모든 것을 따라가지는 못해도. 마음만은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이슬과도 같다. 그저 라떼, 얘기를 하게 될 때 내 나이를 실감할 뿐이다. 한 때 이 얘기를 들으며 피식, 하고 웃던 예전 20대 직장 동료가 떠오른다. 아이고 너는 안 늙을 것 같니. 조금만 지나면 다 그리 생각하게 될 거다.  


늙고 젊다는, 인위적이고 방어적인 경계선을 지우고 나면,


 헨리 나우웬의 『나이 든다는 것』 책 글귀처럼, 이제는 늙고 젊다는 인위적이고 방어적인 경계선을 지워야 할 때인 것 같다. 몇 살이 젊은것이며 몇 개의 주름이 늙은 것인가. 그 누구도 지정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마흔이 넘고 이 글을 쓰는 나는, 젊음이다. 내가 정했다. 땅땅땅.


 그래서 아들아.

네가 자라는 만큼, 엄마 나이가 들어가는 거란다.

네가 키가 자라고 근육이 생기는 만큼, 엄마는 주름이 늘어나고 체력이 쇠해지는 거란다.

그래도 늘.

엄마, 하고 힘차게 부르며 세차게 달려와 꼬옥 안아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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