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레테가 레벨테스트를 말하는구나. 레벨테스트(이하 레테라 칭한다.)를 봐야 학원을 다닐 수 있구나. 이건 뭐지. 그저 동네 영어 공부방을 다니며 테스트는 본 적도 없는데 할 수 있으려나.
"아,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의 전학을 간신히 마쳤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육지에 입성했다. 이제 여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듣기에는 소심한 엄마였고 지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게다가 여기는 육지가 아닌가.
누가 이 학원 좋아요, 여기 보내요,라고 말해줬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다. 하굣길에 교문 앞에 서있는 학부모들이 들고 있던 영어 학원 가방을 눈여겨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결국 세 달이나 지나고서야 반모임을 통해 귀동냥을 했다. 그래서 학원을 정해 떨리는 손으로 꾸역꾸역 전화를 하던 참이다.
결국 하교 후 아들과 학원을 방문했다. 레테를 본다는 말에 아들은 심히 거부하였다. 무슨 시험을 보냐면서. 이 학원을 꼭 다녀야 하냐며. 글쎄, 육지는 그런가 봐. 결과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경험 삼아 한번 봐보자,라고 설득했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설득 못했으면서.
"시험은 2시간 정도 소요되고요. 그동안 저 강의실에 들어가시죠."
"2시간이요?"
뾰족구두를 신고 화려한 차림의 선생님 앞에서 난,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지며. 목소리를 꽹과리처럼 높였다. 아니, 무슨 레테를 2시간이나 본다 말인가. 어정쩡한 자세로 아들을 돌아봤다. 아이도 이미 얼굴이 굳어 애먼 땅만 바라보고 있다. 속으로 벌벌 떨고 있으리라.
"사랑아 풀 수 있는 것만 풀고 와. 할 수 있는 만큼."
짐짓 일부러 차분한 표정과 태연한 몸짓으로 아들을 다독이고는(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강의실에 들어갔다.
선생님께서는 빔으로 띄운 화면을 가리키며 학원의 커리큘럼을 소개했다.
"저희 학원은 아시다시피 강남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학원은..."
"토론과 에세이... 매달 테스트를 통해... 초등학생들은 이미 중학생 과정을..."
"서울대를 비롯해서... 미국의..."
아. 머리의 스위치가 꺼졌다.
여태까지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나. 이렇게 부끄러운 시간이 있었나.
히터를 튼 작은 강의실은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 그리고 우리 부부 넷뿐이었지만. 이미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졌고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목이 바싹바싹 마른다. 어쩔 줄 몰라 영어가 잔뜩 적힌 팸플릿을 뒤적거렸다. 나란히 앉은 남편과 잠깐씩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학부모는 맞는 것일까. 여태 무엇을 한 거지. 그야말로 무식자체였다,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뒤로하고. 빈 강의실에서 영어가 잔뜩 적힌 큰 시험지를 들고 벌벌 떨고 있을 아들이 생각났다. 얼마나 긴장될까. 뭐가 들리거나 보이기는 할까. 아, 실패다.
▲ 담쟁이덩굴
암흑 같은 긴 시간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의 결과 분석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나왔다. 하아. 저녁의 서늘한 공기가 마음 깊이 들어왔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머리와 마음의 열이 내려가는 듯하다. 후우.
시간은 벌써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테스트가 6시에 시작이라 한 시간 소요를 생각하고 저녁도 먹지 않은 참이다. 너무 편하게 왔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니, 여태껏 뭐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 아이들과 때로는 닦달하며 잔소리와 더불어 뒤엉켰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기분이다.
마음속이 얽히고 얽혀 담쟁이덩굴 마냥 복잡했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근처 고깃집으로 갔다. 에너지 소비에는 고기가 딱이다. 아들에게 그저, 고생했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늦어진 만큼 허기진 우리는 서둘러 고기를 흡입했다. 사실 나는 고기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급하게 배를 채울 뿐. 배가 돈독해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들이 사이다를 마시겠단다. 그래, 오늘 만큼은 마셔라. 긴장이 다시 생생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탄식하며 내뱉기를,
역시, 서울.
이때부터 육지 사교육에 대한 거리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름 뚜렷한 교육관을 가지고 기민한 센스가 있던 내게, 레테는 폭풍우의 현장이었다.
맞다. 내가 사교육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도 사실이다. 주변에 정보는 있었지만, 나는 유튜브도 인스타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크게, 전심을 다해, 관심과 열정을 쏟아붓지 않았다. 하지만 나대로 집에서 아이에게 학습의 집중과 공부의 일관성을 가르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결과는 어찌 될지라도, 이 세상에서 끈기와 성실함은 가지고 살았으면 해서.
그런데, 이 문제의 차원이 아니다. 육지의 아이들은. 몸은 초등학교에 속했으나 머리는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또한 컴퓨터, 체육, 논술 등 모든 과목의 사교육을 섭렵했다.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 육지에 거하고 있음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육지로 이사 올 때 학군지, 학원가를 충고했군.
불현듯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 온 사람들이 영어유치원, 국제학교, IB를 운운하던 게 생각났다. 이래서 그랬구나.
그 후 여러 곳곳의 학원을 방문하고 레테를 봤다. 레테의 첫 경험이 가시밭길이었던 만큼 아이는 극도로 긴장을 했다. 그때마다 아이를 설득하는 건 나의 몫. 그러면서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초조했다. 그러나 뭐든지 하나라도 해보자며 여러 시도 끝에 결국, 학원을 정하여 등록하게 됐다. 영어학원 하나 보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지금 암만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이 모든 과정을 A친구에게 푸념하듯이 말했다(이 친구는 대학생 때부터 육지 생활을 하여 정착한 친구다.). A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학을 뗐구나."
"어, 맞아. 육지 사교육에 학을 뗐어."
고개를 절레절레. 혀를 찼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는,
무슨 영어 레테 하나 가지고 그래. 수학 레테도 봐야지. 아냐 이미 늦었어. 빨리 등록해. 벌써 다들 중학교 과정 풀고 있는데. 논술은? 남자아이들은 논술학원도 보내야지. 요즘은 글쓰기가 중요하거든. 뭐든지 앞서가야 한다고. 남들 다해.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초조함이 몰려온다. 정말 그럴까? 하고.
수많은 정보 홍수 속에서(A친구가 말하길, 경험상 진짜 정보는 사실 잘 말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한다며.), 넘쳐나는 사교육의 현장에서. 나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물론 아들의 의견을 동반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때 레테에 휩쓸리던 아들은. 이제 육지에 적응하여 하교 후, 해야 할 공부를 하고 학원을 다녀온 후 놀이터에 가서 2시간씩 논다는 사실이다. 놀이터에 가도 친구들이 (학원에 갔거나 집에서 게임한다고) 없다고 한다. 친구들이 없는데 누구랑 노냐고 물으면, 어린 동생들과 논다고 한다. 간혹 시간이 비어 놀이터를 어슬렁거리는 형들과도. 축구, 캐치볼, 자전거를 타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저는 레테 큰 관심 없어요, 지금은 열심히 놀게요 하는거 마냥.
▲ 일련의 순서와 과정이 중요한 직조체험, 티 코스터 만들기
좋거나 나쁘거나사교육.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교육 현장에서 아이가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부모로서 아들의 역량에 따른 뒷받침과 여건은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되.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욱 집중해 보기로 한다. 비평준화 지역에서 치열하게 공부해 왔던 내가 돌이켜보건대, 어떤 것의 결과가 모든 과정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