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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Nov 06. 2024

수영장에서 씻으면 기분이 좋그든요.

수영장에 갈 때 나는 거지꼴이다. 그것도 상거지.

훌러덩 벗기 편한 큰 사이즈의 트레이닝복, 윤기 하나 없는 감자 껍질 같은 맨얼굴, 하루의 피로와 먼지가 덕지덕지 엉겨 붙은 머리. 여름엔 맨발에 크록스, 겨울엔 언발에 크록스.

야밤에 큰 가방을 들고 거지꼴로 다니자니 누가 보면 신고할까 봐?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더 수상한데)


수영 강습은 저녁 9시. 퇴근하고 꿉꿉한 피로 곰을 씻어내고 싶지만 8시 30분까지는 손발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씻지 않는다. 애들한테는 집에 들어오면 바로바로 샤워하라고 잔소리하면서 이 무슨 내로남불이세요.

하지만, 수영장에 가서 씻으면 기분이 좋그든요. 그 기분 알랑가 몰라. 더운 여름 갈증에 입술이 바싹 말랐다가,  머리가 깨질듯한 시원한 보리차를 캬아 하고 마실 때의 그 기분이라면 설명이 되려나.


큰 행복을 위해 작은 고통을 견디는 기쁨이랄까. 자차로 출근해서 마시는 커피보다, 만원 지하철에 시달린 뒤 마시는 커피가 더 고소하다. 배고플 때 먹는 엽떡이 더 맛난 것은 당연. 주변이 온통 드라마 더 글로리로 난리였을 때에도 파트 2가 완결날 때까지 꾹 참았던 사람이 바로 나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랄까. 조금 이상한가요?




일상의 찌꺼기를 물속에 흘려보내러 샤워장 입장.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가운 듯 쑥스러운 듯 인사하며 훌러덩훌러덩 하루의 피로를 벗어던진다. 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씻는다는 것이 영 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도 취미에 맞지 않아 꺼려했다. 하지만 내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엄마 뭐 해? 언제 나와? 아이구 얼른 씻고 나가서 빨래 돌려야지 이런 거) 없는 샤워장에서 쏴아 물을 맞을 때 느껴지는 그 시원함. 그 시원함은 계곡에서 폭포를 맞는 것만큼이나 짜릿하다. 


아이라이너로 한껏 크게 그린 눈도 없고, 배에 힘을 줘도 접히기만 할 뿐이므로 편하게 내민다. 그저 내가 가진 태초의 얼굴과 몸뚱이 그것을 아무런 꾸밈없이 내보인다.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를 숨김 없이 드러내는 것은 생각보다 별 일 아니라는 것을, 수영장에서 샤워를 하며 알게 되었다. 사심 없이 서로의 맨얼굴을 내보이며,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회원님들에게 묘한 편안함을 가지는 것은 덤.


수영을 하기 전 '아휴 오늘도 피곤하네요, 밥을 너무 많이 먹고 와서 부대끼네요, 오늘 퇴근을 늦게 해서 바삐 왔네요'하며 생활을 나눈다. 수영을 하고 난 뒤에는 '수고하셨어요, 회원님 접영 너무 멋져요, 오늘 자유형 하다가 숨차서 죽는 줄 알았잖아요'하며 밝혀 보는 물질의 소회. 샤워장은 토크쇼 스튜디오가 된다. 단순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명함이 필요 없다.


불타는 고구마 같은 얼굴을 샤워장의 토크와 함께 식히고, 다시 커다란 가방과 함께 차가운 밤공기를 맞는다. 갈 때는 누가 볼까 무서운 거지꼴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다르다. 로션을 발라 반질반질한 얼굴, 부드럽고 촉촉이 젖은 머리칼, 어느 이온 음료 광고의 배경 음악을 흥얼거리며 상큼하게 걸어 본다. 그래봐야 수수한 아줌마일 테지만.


수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하루의 긴장과 복잡한 생각도 샤워장에 흘려보내고 상쾌해진 마음만 갖고 간다.


수영도 좋지만
수영장 샤워도 좋그든요.


행복하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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