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부터 Nov 08. 2024

수능이 온다

수능 샤프 모아요

2025학년도 수능 감독 명단이 나왔다.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에서는 절반 정도의 선생님이 수능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나는 당연히 수능 감독으로 당첨. 몸도 튼튼하고, 수능 감독하기 딱 좋은 나이라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임신했을 때랑, 고3 담임을 맡았던 해 학교에 대기하며 업무를 했을 때 빼고는 개근이다. 시험실 설치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감독으로 가는 학교에 5교시 시험은 있는지, 밥은 맛있는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누구랑 같이 감독을 가는지 등등. 최신 정보에 민감한 김 모 선생님의 고급 브리핑 정보를 부지런히 귀에 담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교사를 하기 전에는 수능 감독관을 부정행위를 잡아 내는 형사쯤으로 생각했다.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무서운 느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능 감독관은 수험생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수능이라는 배가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장이라는 생각이다. 

감독관으로 시험실에 들어가기 전 마음으로 두 가지를 기도한다. 첫째는, 내가 들어가는 시험실의 수험생들이 아무 불편 없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둘째는, 이 수험생들이 아는 문제 다 맞고, 찍은 문제도 조금은 맞게 해 주세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 생각도 나고, 동생, 우리 아이도 떠올린다. 아마 대부분의 선생님이 같은 마음이리라.


수능 감독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바로 긴긴 시간을 꼼짝 않고 있는 것이다. 시험지를 볼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수험생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돌아다녀서도 안되고, 누군가에게 시선을 두어서도 안 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시험실의 공기처럼 있는 것. 소리 없이 생각의 날개를 펼치는 수밖에.

한 번은 2교시 수학 시간 100분 동안 그 해에 소개팅했던 사람들 목록을 머릿속으로 주욱 떠올린 적이 있다. 이름, 나이, 직업, 어디서 만났는지, 몇 번 만났었는지, 왜 잘 안되었는지를 찬찬히 헤아려 보니 금방 종료령이 울렸다. (수많은 소개팅에도 솔로인 신세에 현타가 왔던 것은 비밀이다. 그 겨울 추웠지.) 올해는 무슨 생각을 머릿속에서 굴려야 잘했다 소문나려나.


꼼짝 마 미션의 하이라이트는 3교시 영어 듣기 평가. 이때는 모든 것을 멈춰야 한다. 창문도 닫고, 히터도 끄고, 모든 소음을 차단하세요. 비행기도 멈춰!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망부석이 된다. 점심 먹고 깜빡 졸린 시간, 눈을 부릅뜨고 방송 소리를 들으며 이해하는 척도 해 본다. (와 저 학생은 듣기 문제 풀면서 독해 문제 엄청 많이 푸네. 감탄도 하고) 그래도 3교시는 시간이 짧고 듣기 평가도 있어서, 그나마 시간이 금방 가는 느낌적인 느낌. 수능은 이러나저러나 시간과의 싸움이다. 감독관도, 학생도.


수능 감독을 하며 그나마 시간이 잘 가는 일을 고르라면 응시표를 보며 수험생을 확인하는 일이려나. 응시표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사진 기술의 놀라움에 감탄하기도 여러 번. '이 학교에서 시험을 많이 보러 왔구나. 이 학생은 멀리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와서 시험을 볼까. 어머 얘는 전에 내가 근무하던 학교 학생이네 반가워라. 우와 이 수험생은 나이가 30살이네, 어떤 새로운 꿈이 있어서 수능을 다시 보는 걸까.' 수험생의 얼굴과 응시표를 번갈아 보며 그들의 꿈에 살짝 하이파이브를 날려본다.


주의사항 :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 것. 틱장애가 있는 한 명의 수험생만 배정된 시험실을 감독했던 적이 있다. 눈을 마주치면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거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받아 들고 시험실에 들어갔다. 죄지은 사람마냥 한껏 눈을 내리깔고, 입을 꼭 다문 채로 시험실의 빈 벽만 한참 바라보았던 기억.

고개를 푹 숙인 수험생을 흘깃흘깃 지켜보니, 마치 튀어나오는 소리를 막으려는 듯 왼쪽 엄지 손가락을 앙하고 물며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시험을 보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던 장면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공기처럼 눈알만 굴리며 수험생들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누군가가 쿠쿠 코를 고는 소리였다. 시험이 너무 쉬웠거나, 포기하고(아마도 이 경우)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너무 깊이 잠든 거겠지. 수험생이 자는 것은 깨우면 안 된다. 컨디션 관리일 수도 있다나.

하지만 이렇게 소음을 유발하는 경우는 다르다. 다른 수험생이 시험 보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가서 톡톡 두들기니 깜짝.하며 살짝 일어난 수험생. 눈을 마주치고 둘째 손가락을 입 위에 살포시 올려 본다. 이내 알겠다는 눈빛과 함께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잠이 드는 그 학생. 그래 꿈나라 요정한테 답이라도 물어보렴.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던 내 표정은 어땠으려나.


사실 수능 감독을 하는 것이 썩 반가운 일은 아니다. 수능 전날 오후부터 긴긴 교육을 받고, 수능 날 새벽 별 보며 출근하여, 해 진 저녁 퇴근. 집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몸살이 난다. 뻣뻣한 긴장 상태로 하루를 보내서겠지. (수험생은 어리기나 하지.) 그래도 감독관을 위한 의자도 마련해 주고, 감독 중 발생한 민원을 위한 보험도 들어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수능 일주일 전, 아직 오지도 않은 그날의 긴장에 벌써 아고고 소리가 나는 것 같지만,

어디 시험을 봐야 하는 수험생, 그 부모님의 마음보다 더할까.


수험생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추운 날씨와 더운 히터 바람을 동시에 견뎌낼 수 있는 하이브리드 옷차림. 사분사분 구름 위를 걷듯 조용히 걸을 수 있는 편한 신발. 감독관 이름을 꾹꾹 확인해 줄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도장. 그리고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아 배터리를 갈아 둔 아날로그시계까지. 감독관으로서의 준비물을 잘 정리해 보자.


다 모아두고 싶었는데 몇 개는 없어져서 아쉽네.

누군가에게 아주 중요한 날을 도와준다는 보람. 다른 누구도 아닌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
수고로움을 조금은(아주 아주 쪼오금) 알아주는 듯한 감독관 수당. 올해는 어떤 색일까 궁금한 수능 샤프.

그거면 됐지 뭐.


수험생, 수험생의 가족,
수험생을 도와줄 선생님들
모두 무사히 하루를 보내길.



매거진의 이전글 뷔페 먹고 갈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