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이른 아침, 비장하게 김치냉장고를 열어 본다. 새 김치들이 몸을 뉘일 자리를 미리 준비해 놓은 나, 프로 주부가 다 되었군. 자리에 딱 맞는 김치통 세 개를 둘러메고 눈길을 나선다. 동생들이 와 있을까?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멀리 살며 자취하는 막내, 돌도 안된 조카를 키우는 둘째보다 늦게 가는 건 좀 모양 빠지니까.
친정아버지가 가을 내내 옥상에서 말린 고추로 만든 고춧가루, 옥상 텃밭에서 가꾼 쪽파, 갓, 미나리가 가지런히 나를 반긴다.
'와 아빠 이걸 다 옥상에서 키웠다고요? 대단해 우리 아부지. 덕분에 유기농 김치 먹겠다'
김장날은 평소보다 두 음계 정도는 높은 '솔'톤으로 부모님께 호들호들 호들갑 서비스를 한다. 그것이 일 년 치 양식을 제공받는 자의 태도이니. 지금 눈에 보이는 갖가지 재료들을 키우고, 사고, 다듬고 하느라 아마 지난 일주일을 농수산물 시장으로 재래시장으로 마트로 다리가 퉁퉁 붓도록 다니셨겠지.
각종 스테인리스 다라이(볼이라는 말은 영 맘에 안든다)를 꺼내며 우당탕탕 사물놀이 중인 엄마의 말이 이어진다.
'역시 우리 부지런쟁이 큰 딸이 제일 먼저 왔구만'.
나이 마흔이 다 되어도 엄마의 칭찬에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나, 금쪽이 맞는 듯. 얼마 전 내린 폭설로 배춧값이 갑자기 올라 절임배추로 노선을 변경했다는 엄마의 TMI에 진심을 다해 맞장구를 쳐 본다. 아싸 일거리 하나 줄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김장 재료들을 보며 빠진 것은 없는지 신중하게 하나씩 손으로 꼽아 보는 엄마. 고춧가루는 올해 것이 맞는지, 이번 김치에도 꼴뚜기를 넣는 것인지(김치 먹다가 꼴뚜기랑 눈 마주치면 좀 별로라) 셰프님께 조용히 여쭤 본다.
언젠가 김치를 다 담고 나서 주방 한 켠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생새우를 발견했을 때의 엄마 표정이 기억난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눈치 챙겨 새우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 년 내내 김치 맛이 영 시원하지 않다며 아쉬워하던 엄마를 달래느라 더욱더 맛있게 먹느라 진땀이 났었지.
'엄마 뭐 빠진 거 없나 잘 봐봐' '가만있어봐.' '응, 나 가만히 있어.' '저저 매실액 빠졌다.' '여기. 엄마 이번엔 다 된 거지?' '맞다. 여보 깨 좀 갖다 줘요.' 엄마의 아바타가 되어 각종 양념을 챙겨 넣는다.
이번 고춧가루 색이얼마나 고운지. 백령도에서 받아온 액젓의 감칠맛이 얼마나 대단한지, 김장 날짜에 딱 맞게 심은 갓이 얼마나 야들야들 맛있는지 엄마는 오늘도 스마트 기기가 되어 그 재료에 담긴 사연을 읊어대기 바쁘다. 우리 가족의 일 년 양식이 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김장 재료들을 마주하니 가슴이 웅장해지네.
태양처럼 새빨간 김장 속이 완성될 무렵 최자매 2호 3호 도착. 역시 센스 있는 우리 막내, 커피 조공을 잊지 않고 왔다. 엄마는 달달한 바닐라라테. 나에게는 아린 혀를 씻어 줄 차가운 라테.
어 그런데 젊은이들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잖아. 라테는 역시 라떼 세대들만 마시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입맛을 바꿀까.
'맛있어? 간 봐봐. 좀 짭짤해? 뭐 더 넣을까?' 뭐가 빠진 게 없나, 맛이 있나 없나, 자꾸만 동공이 흔들리는 엄마. 무엇 무엇을 넣었는지 부지런히 입으로 조잘거려 드리는 일등 조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 보지만 한계가 있다. 나는 뭘 먹어도 대충 맛있는 막입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간잽이 둘째가 나설 차례. 절인 배춧잎에 김치 속을 싸서 한 입 먹어 본다. 신중하게 오물거리는 그 입을 보며 엄마와 나는 숙제 검사 받는 학생처럼 침을 꿀꺽 삼킨다.
"음, 딱 좋아." "오케이. 진행시켜"
김장 매트를 사이에 두고 세 자매가 동그마니 마주 앉았다. '이 김장 매트 만든 사람 진짜 상 줘야 되지 않냐. 김장할 때 앞치마 그렇게 귀여운 거 갖고 오기냐. 이 배추는 왜이리 크냐. 가발로 써야겠어 아주 이쁘네. 이 배추는 몽당연필인디? 글씨 써봐라. 이 배추는 왜 자꾸 살아나는겨, 밭으로 다시 가겄어.' 매년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충청도식 유머와 함께 김장에서 시작된 토크는 산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카톡으로 매일 근황토크를 하는데도 만나면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우리 자매의 침과 사랑을 그득 담아 김치 속을 채운다. 아마 그래서 더 맛있을 지도.
구수한 토크와 함께 각자 야무지게 들고 온 김치통에 김치가 차곡차곡 채워진다. 우리가 김치 속을 못 만들어서 그렇지(그게 중요하긴 한데), 김치 양념 버무리는 건 잘한다니까. 김치통 모양만큼이나 김치 모양도 제각각인 세 자매. 나는 무채가 굴러다니는 게 싫더라 대충대충 양념을 묻히기만 하는 나, 새빨갛게 많이 많이 넣어야지 배춧잎마다 속을 가득 채워 넣는 둘째, 나는 굴 많은 거 좋아 굴을 쏙쏙 골라 넣는 막내. 옆에서 가지런한 글자로 'ㅇㅇ네', '먼저 먹을 것', '나중 먹을 것'을 써주시는 꼼꼼쟁이 우리 아버지 최고.
김장이 있는 풍경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밥과 투박하고 부들부들한 수육이지. 사실 이거 먹으러 김장하는 거 아니냐며. 들통에 팔팔 끓으며 김장의 노동요로 코와 귀를 즐겁게 하던 수육을 마주한 순간, 오늘 하루는 귀여운 뱃살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다. 입술에 벌건 김치 양념을 묻히고 볼이 터져라 먹어 본다. 그래 이 맛이야.
'엄마 이거 고기 너무 크게 자른 거 아니에요?' '크게 크게 복스럽게 먹어 우리 딸.' '어서 먹어 저기 더 많이 있어. 아빠가 고기 여섯 근 사왔다. 엄마가 반찬통에 하나씩 챙겨 놨으니까 챙기고.'
부모님과 딸 셋, 다섯이었던 가족이 어느새 열명이 되었다. 다섯 식구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열명이라니. 식구가 늘어나니 부피도 커지지만, 행복의 밀도가 더 꽉꽉 채워진다. 행복의 색도 더 다채로워지는 느낌이다. 예전보다 더 크게 많이 함께 웃을 수 있어 감사하다.
70이 훌쩍 넘은 우리 아버지부터 10개월 된 조카까지. 모두가 모여 앉아 입 안 가득 사랑을 집어 넣으니 다들 안 먹어도 배부른 표정이다. (그런 것치고는 좀 많이 먹기는 함.) 앞으로 아이들도 더 크고 새로운 식구도 또 들어오겠지. 사람이 재산이라는데 우리 엄마 아부지 이제 딸부자 아니라 그냥 부자 되셨네.
친정 엄마, 아버지가 언제까지 딸들의 김치를 책임져 주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아이고 힘들어 못하겠다'하면 그때는 동생들과 함께 내가 해야지. 김장은 김치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니까. 엄마, 아빠가 주신 그 사랑 제가 계속 동생들과 이어갈게요. 오래오래 함께 해요. 그때는 엄마 아버지는 와서 구경하고 입으로만 도와주세요. 맛난 수육도 삶아 드릴게요. (막걸리는 빼고요) 새빨간 김치 먹고 행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