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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등산

과거가 될 지금 이 순간

가족과 떠나는 노고단 겨울산행

by 새벽하늘

가족과 함께 가는 겨울 산행은 이번횟수까지 더하면 무려 열 몇 번째다. 3년전 쯤 제주도 한달살이동안 여러 오름들을 올라가 보았고 주말이면 우리지역의 크고 작은 산들을 거닐어 보았다. 산을 오르는 게 힘들긴 해도 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라 좋아하는 것을 함께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항상 즐겁다.

남편이 2주전쯤 노고단에 다녀왔다. 날씨가 갑자기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시기라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겨울 산의 상고대가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남편도 아이들과 함께 다녀오면 좋겠다고 말했었는데 미친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남편의 제안을 두말없이 받아들이고는 등산날짜를 확정했다. 이날은 어떤 스케줄도 잡지 말라고 남편에게 재차 말했다.

전날 밤부터 분주했다. 아이젠과 등산가서 우리에게 에너지를 보충해줄 초콜릿바, 일용할 양식이 되어줄 컵라면, 그리고 따뜻하게 보온해줄 내복까지 바리바리 챙겨놓고 잠을 청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잠이 없는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뜨고는 식구들이 아침에 먹을 참치주먹밥을 정성스레 만들고 대충 나갈 채비를 마쳤다. 식구들을 깨워 밥을 챙겨먹이고는 노고단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맑은 하늘을 기대했었지만 그 전날부터 구름이 잔뜩 끼더니 아침에도 여전히 흐렸다.

스타벅스에서 사이렌오더로 커피를 주문했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 드라이브 스루가 무색할 만큼 언제나 차들이 즐비하게 서있어서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아주 초고속이다. 커피를 받아들고는 구례까지 2시간 10분쯤 되는 거리를 향해 달렸다.

2년 전에 처음 방문했던 구례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들이 지금보다 두 살이나 더 어렸을 때였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둘째아이가 사방팔방을 쳐다봐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뒷자리에서 실망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이제 차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노고단이다 성삼재까지 가는 길은 굽이굽이 이어졌다. 구불한길을 10분정도 지나고 나서야 시암재 휴게소에 다다랐다. 여기서 차를 주차해놓고 가야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도로위에 멈춰서 있던 차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남편이 2주전에는 눈이 많이 쌓여 통제되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날이 따뜻해서 도로상황이 좋은지 노고단으로 향하는 입구인 성삼재에 바로 주차를 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2년 전 가을에 왔을 때 보다는 차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에서 노고단 쪽으로 올려다보니 나뭇가지에 쌓여있는 눈은 하나도 없었지만 땅은 새하얀 눈으로 이불처럼 덮여있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10년 만에 한번 볼까 말까한 귀하디귀한 눈을 보고는 아이들도 신이 났다. 내가 기대했던 풍경보다 예쁘진 않았지만 바쁜 일상에 쉼표 같은 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산행이 더 기대되었다. 노고단에 있는 눈은 우리지역에서 만지고 밟았던 눈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지역의 눈은 내렸다하면 물기를 잔뜩 머금어서 눈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축축한 눈이었는데 이곳의 눈은 뽀송뽀송했다. 마치 슈가파우더 같은 눈이었다. 발길에 닿으면 스며들어 없어지는 눈이 아니라는 게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올라가는 동안 아이들과 남편은 쌓여있는 눈을 한움큼 잡아 똘똘 뭉치고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서로를 향해 던지고 까르르 웃었다. 오르막이 계속되었지만 보통의 산행과 다른 풍경에 지루할 틈 없이 쉼 없이 올라갔다. 평소 달리기와 근력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했던 나는 몇 구간 빼고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저 옷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시린 추위가 겁이나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어서 몸이 무거웠다. 이 옷만 없으면 날아갈 듯 사뿐히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너무도 많이 입었다.

몇 발자국 가다가보니 눈길을 헤치고 가는 게 힘이 들었다. 드디어 아이젠을 가방에서 꺼냈다. 재작년 겨울, 노고단에 가려고 사뒀던 아이젠이었는데 큰아이의 신발에 겨우 들어갔다. 올해가 지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젠을 남편이 아이들에게 다정히 끼워주었다.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속도에 맞춰 발 사이즈도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듯하다. 벌써 아들의 발사이즈는 나를 능가했다. 지금 아이의 어렸을 적을 회상하듯 지금 이순간이 그리워지는 시기가 어김없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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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피소에 도착했다. 지난 9월 과체중으로 건강의 경각심을 느꼈던 나는 4개월만에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설레었다. 남편이 가지고 온 이 라면은 아주 신박했다. CU와 경동보일러가 합작했다는데 산위에서든 어디서든 간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라면을 먹을 수 있다니. 언제나 아이들을 우선순위로 두는 남편은 둘째가 라면이 매워서 못먹을까봐 순한맛 라면을 미리 준비해왔다. 일반 윗칸에는 컵라면처럼 라면을 뜯고 스프를 뿌려놓고는 아랫칸에 발열체가 들어있는 비닐을 뜯고 물을 조금 붓고 뚜껑을 덮고 기다리는데 물이 끓으면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입을 쩍 벌릴 만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위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라면을 먹을 수 있다니! 때로는 과학이 멀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언제 이렇게 우리 일상 속에 다가와서 스며들었는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는 현실이 때로는 믿기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배낭이 놀랍도록 홀쭉해졌다. 깃털처럼 가벼운 배낭을 메고는 노고단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산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손 안에 들어 올 것처럼 작았고, 저 멀리 섬진강 줄기가 보였다. 섬진강 강줄기는 산 주변을 따라 구부러져 흐르는 듯 했다. 그리고 노고단 고개에서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은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노고단은 해발 1500m쯤인데 누구나 갈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놔서 그런지 십여 년 전에 갔었던 높이가 비슷한 중국의 태산보다 훨씬 오르기가 쉬웠다. 큰 아이는 자기의 휴대폰을 꺼내서 산 주변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정성스레 폰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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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눈 안에 담고는 드디어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눈발이 조금씩 날리더니 제법 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작년 초, 한라산 정상에 오르려다 눈 대신 비가 많이 내려서 등반에 실패했었는데 그때의 실패를 만회해 주기라도 해주려는 듯 하늘도 우리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다음날 많은 눈이 내릴 거라는데 이 눈이 다음날까지 계속 이어지려나보다.

지금 이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자연을 좋아하길 바랐던 나의 염원대로 그 방향으로 향하며 크는 중인 것 같다. 그동안 아이들이 쓰고 읽는 삶을 지속하길 바랐건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큰아이가 노고단에 갔다 온 일을 글로 썼다며 자랑하는 이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기회가 때에 맞춰서 온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인내와 시간,
이것보다 강한 무기는 없다.

- 레프 톨스토이 -


육아라는 게 콩나물을 키울 때 시루에 물을 주면 쑥 빠져나가지만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물을 주다 나중에 시루를 열어보면 쑥 커있는 콩나물을 발견할 수 있듯,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면 서서히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저 지금처럼 자연을 즐기고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더디게 가더라도 방향만 맞으면 되니까 결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치고 불안에 떨게 만드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올해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떠나보려고 한다. 비록 바쁘고 부족한 엄마지만 아이들의 내면이 꽉 찰 수 있도록 분주히 움직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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