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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 Nov 03. 2024

그는 조립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집의 안 숨은 고수

Image by  PublicDomainArchive from Pixabay


그때는 몰랐지만, 선풍기가 시작이었다.

무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이었나 보다. 

방 두 칸짜리의 아담한 신혼집에선 "필요 없는 물건은 신속하게 사라지라"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니 주말마다 물건 정리도 자연스러운 일과. 골목길이 훤히 보이는 작은 방 창문까지 활짝 열어젖힌 어느 주말. 나는 컴퓨터 본체를 해부할 때 쓰던 만능 도구, 십자드라이버로 작은 선풍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먼지가 잔뜩 낀 부품들을 씻어 내고 다시 반대로 돌리며 조립을 해서 부직포를 씌우면 집안 어딘가 적당한 틈으로 자취를 감출 준비 완료.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2년 월세 계약을 끝내고,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아이가 태어났고 몇 개 되지 않아도 부피를 차지하는 장난감들 덕에 집은 여전히 좁았다. 거기에 더해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 어린이날 선물로 핫핑크색 세발자전거가 도착했다. 




좁은 거실에 펼쳐 두기엔 작은 바구니에 차양까지 부품들이 꽤 있는 세발자전거. 그날 나는 남편을 기다릴 수 없어서 구성품에 있던 육각렌치를 돌리기 시작했다. 선풍기 보다 난도가 있었지만 조립 설명서를 정독하고 조립에 성공했다. 좁은 거실에서 내내 타고 돌아다녔던 아이는 그대로 자전거에 앉아 퇴근한 아빠를 반겼다. 


자연관찰 전집을 사고 받은 원목 미니 책장 조립은 식은 죽 먹기. (제발 조립된 자전거를 사라고 했건만) 반조립으로 도착한 남편의 자전거도 내손을 거쳐서 바퀴가 돌아갔다. 몇 년 전 이사하며 주문한 책장을 조립할  때 역시, 전동 드라이버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몇 시간째 씨름만 하던 그를 대신해 일반 드라이버로 내가 조용히 마무리를 했었지. 약한 바람에도 작은 방 문이 열리는 게 신경 쓰였던 그는 문고리도 주문했었다. 덕분에 내 실력은 향상되었다.

 

Image by Евгений from Pixabay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얼마 전부터 싱크대 수전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는 것이 신경 쓰인다. 아니다 다를까, 오늘 수전을 주문하는 그를 보았다. 나는 우리 집의 안 숨은 고수로 점점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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