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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연 Nov 01. 2024

내가 먹는 보리차가 오줌이냐고?

인도 학교생활의 시작



인도에서 들어간 내 첫 학교는 인생에 정말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거의 모든 한인들이 다니던 미국과 영국 국제학교는 이미 인원이 다 차서 들어갈 수 없었고, 자리가 날 때까지 1년을 대기해야 했다.


1년 대기를 걸어둔 채 내가 입학했던 학교는 Delhi Public School, International이라는 곳이었다.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외국인 학생을 받아주는 국제학교이긴 하나, 당시 학교에 들어갔을 때 전교에 외국인 이라고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한국인 여학생 그리고 프랑스 남학생뿐이었다. 전교에 외국인이 고작 2명인 곳에서 남동생과 나는 인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남동생은 그나마 운 좋게 자리가 나서 3개월 정도만 다니다 미국 국제학교로 넘어갔지만, 나는 약 1년을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 학생으로 지내게 되었다.


나는 기본적인 영어회화는 가능했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방문 수업을 통해 영어를 공부하였고, 인도에 가기 전까지도 외고를 목표로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정도 회화는 된다고 얄팍한 자신감에 차 있던 나는 수업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바로 인도인들의 강한 억양갈겨쓰는 필기체 때문이었다. 인도 영어는 영국식 영어와는 또 다르다. 영국식 영어처럼 발음이 센 편이긴 하나 인도인들만의 독특한 억양이 한 겹 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듣게 되면 도대체 영어를 하는 건지 힌디(인도어)를 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렵다.



1년 간 다닌 Delhi Public School, International 학교



그리고, 인도 학교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필기체를 사용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거도 힘들지만 무엇을 쓰는지 알아보는 것도 힘들다. 듣기와 쓰기의 이중 고통은 처음 입학한 날부터 나를 짓눌렀다. 나는 매일매일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도 될지 물었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선생님들을 쫓아가 모르는 단어를 질문했다. 원래도 악바리인 나는 그곳에서 더 악바리처럼 행동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수업이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내 몸의 온 신경세포들을 일깨우며 수업에 집중해야 했다. 매일매일을 저렇게 노력한 끝에 나는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역시나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없는지라 지렁이 같던 필기체는 2달 정도 지나니 서서히 눈에 익었다.


손으로 익힌 힘이 참 무서운 게 몇십 년이 지났지만 당시 배운 영어 필기체를 아직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덕분에 남들보다 좀 더 멋들어진 영어 캘리그래피도 가능하기에 당시 열심히 필기체를 연마하고자 한 나 자신이 기특하고 고맙다.



주로 필기체로 쓰는 영어 캘리그래피



인도는 빈부격차가 정말 심한 나라다. 못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 사는 부자들도 정말 많은 곳이다. 내가 가게 된 인도 학교는 아무래도 외국인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 학교였기에 잘 사는 인도 학생들이 많이 재학하는 곳이었다. 그 친구들은 한국의 일반적인 부유한 학생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자존감이 높고 남에게 지시를 하는 것에 익숙했다.


한국이 인도보다 잘 사니 당연히 그곳에 가면 나도 대우를 잘 받겠지 쉽게 생각했으나, 막상 친구들과 어울리기 란 쉽지 않았다. 물론 내 앞에서 대놓고 나쁘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징키’ (눈이 작은 동양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라고 나를 부르거나 내가 가져온 물건들에 대해 수군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당시 학교는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을 먹었는데, 내 도시락은 항상 친구들의 관심 대상 1순위였다. 한국인들에게는 정겨운 집 반찬인 계란말이, 멸치볶음 등도 그들에게는 이상한 반찬이 되었다. 냄새가 난다고 코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루는 내가 투명한 텀블러에 보리차를 담아와 마시고 있었다. 한 남학생이 그걸 보고는 “지(Jee), 지금 오줌 마시는 거야?”라고 물은 적도 있다. 진담 반 농담 반이었겠지만 항상 열심히 싸준 엄마의 보리차와 도시락이 놀림받았을 때 울고 싶었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줌으로 오해받은 잊지 못할 보리차



하지만 당시의 중학생이었던 나는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했다. 친구들 앞에서 울어버리면 내가 놀림받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울음 대신 웃음을 지으며 “이거 그래도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음식이야. 먹다 보면 나름 맛있어!”라고 어리숙한 영어로 설명했었다.


지금의 나라면 도시락을 안 싸갔을 법도 한데, 당시 나는 굴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갔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먹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나를 끼워주지 않으려는 눈치가 보여도 멀찍이라도 앉아서 같이 어울리려 했다. 다 큰 성인이 그랬다면 ‘재는 참 눈치도 없다’고 더 안 끼워줬을 법도 한데 모두들 아직은 순수한 중학생들이었기에……차츰 나는 그들의 무리에 자연스레 앉아 도시락을 먹는 평범한 같은 반 학생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도시락을 꺼내도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특별하고 새로워 보이는 자극도 항상 보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되듯이.. 로컬학교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나는 얼굴이 조금 다르게 생긴, 영어 발음이 좀 다른 같은 반 학생으로서 지내게 되었다.



각자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을 먹는 인도 학교



내가 인도 로컬학교에서 보낸 1년은 단순한 1년이 아니었다. 그 1년을 전후로 내 성격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인도로 가기 전까지 나는 초중학교에서 매년 반장 또는 부반장을 할 만큼 활동적이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존재감이 없는 친구들과는 거리를 뒀다.


하지만 인도에서 첫 1년을 보내고 나의 에너지는 외면이 아닌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영어가 능수능란하지 않다 보니 속마음이나 생각을 말보다는 글에 녹여내는 게 편해졌고, 어려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글쓰기에 집중하였다.


처음 겪는 인도 학교생활에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날 선 마음이 들 때마다 글에 쏟아내면서 내 마음은 진정되고 위로 안정되었다. 그곳에서 지낸 1년은 단순한 외국생활 1년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작가라는 일을 결심하고 펼쳐 나가고자 마음먹게 된 힘이자 밑바탕이 되어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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