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소년가장이 된 나의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뇌경색이었다. 급히 병원에 가셨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안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 혼자서 아버지의 병원비와 우리 가족을 부양하는 건 불가능했다.
동생 셋은 아직 중학생,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이제 집안의 장남인 내가 뭔가를 해야 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입시 원서를 쓰던 도중, 나는 대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 꿈은, 내 미래는 그 순간 사라졌다. 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고, 언젠가는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연구도 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물론, 그 꿈은 내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자라던 것이었지만.
하지만 그 해, 나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폐기물 처리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혹한 환경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폐기물들을 처리하고, 몸은 항상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한 겨울의 추위나 여름의 폭염은 내게 더 이상 날씨가 아니었다. 그저 또 하루를 버티기 위한 장벽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일하면 언젠가는 돈을 모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보니,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동생들은 이제 제각기 제 길을 찾아갔지만, 나만은 아직 이 고단한 일에 갇혀 있었다. 삶의 의미도 잃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옳은 건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그때 나는 폐기물 처리장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폐기물에는 유해물질도 있어서 건강도 악화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이곳저곳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막노동부터 공장 일, 농번기에는 농장일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 내 미래는 여전히 어두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나는 중년이 되었다. 연애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법인 택시 기사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다. 하루하루의 막노동에 지친 나는 이 일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택시 기사가 된다고 해서 큰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꾸준히 일하고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택시를 운전할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길을 찾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고,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서툴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해 갔다. 거리를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승객들과의 대화는 때로는 내게 위안이 되었고, 또 어떤 때는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어떤 때는 승객의 몇 마디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택시를 몰며 가장 많이 생각난 것은, 내가 포기했던 '공부'였다. 특히 수학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나 쉬는 날이면 다시 책을 펴고 수학 문제를 풀어보곤 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흘렀고, 머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을 푸는 순간만큼은 내가 다시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현실적인 고민들이 내 앞에 다가왔다. 수학을 단순히 공부로만 끝나는 건 나에게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가져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수학을 통해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이 흥미와 수학을 어떻게 현실 세계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수학을 이용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이 수학을 주식 투자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주식투자를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수학적 사고와 논리를 활용한다면 주식 시장에서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