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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송 Nov 03. 2024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에 신경전

이 집 아들과 그 집 아들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 덮인 크리스마스이브. 우리는 저녁 비행기로 여름의 호주로 떠난다.

남편과 처음 만났던 나라, 애틋한 신혼 보냈던 나라, 아들이 태어난 나라, 5년 전 깊은 고민 끝에 떠나왔던 그곳으로, 8살 지호와 단둘이 여행을 결심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우린 하늘을 날고 있을 거야.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르지." 남편을 설득하느라 티켓팅이 늦어져 버려 어쩔 수 없이 크리스마스 전날 떠나게 되었지만, 지호에겐 한쪽 눈을 찡긋. 허무맹랑한 말로 포장을 해본다.     




여행이 확정되니 나의 염려들은 잔소리가 되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호주에 가면 이든이 집에 있을 거야. 그 집 규칙을 따라야 해. 이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이모랑 삼촌 말도 잘 들어야 하고.

"아들, 잘할 수 있지?"

처음 얼마 동안은 귀 담아 듣고 정성껏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출발 날짜가 다가오자 돌아오는 건 무심한 단 답뿐. "네!" 아주 자신 있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 달 살이, 너와 함께라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하룻밤을 꼬박 날아서 비행기에서 내리니 눈부신 태양과 익숙한 시드니 공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지호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이든이'의 엄마, 나의 또 다른 친정 언니가 되어준 '정민언니'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언니가 없었으면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었을까. 과연 다시 오고 싶었을까.

"정민이 이모~"

작년 겨울, 한국에서 한번 만나서 그런지 지호도 낯설어하지 않고 이모에게 달려간다.      





크리스마스 당일이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도로가 참 조용하네. 다들 어제 늦게까지 파티를 했겠지. 보통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빠른 속도로 시드니 시내를 통과해, 4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어쩜 동네가 그대로야."

정말 5년 전 그 모습 그대로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두세 번의 이사를 했다고 들었지만, 언니네는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짐을 꺼내 집으로 올라가니 이든이 아빠와 이든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이 집 아들과 그 집 아들이 다시 만났다.     


이 집 아들과 그 집 아들. 너무 다른 둘.

이든이와 지호는 태어나면서도, 크면서도 참 달랐다. 지호는 예민하고 불안이 높고, 뭐든 앞 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고, 이든이는 순둥순둥 순하고 마음이 여렸고 조심성이 많았다. 의젓하게 지호도 잘 챙겼다. 마치 형이 동생에게 그러하듯.





그 시절의 우리는 눈만 뜨면 만났다. 운전을 못하는 나 때문에 언니 차 뒷자리엔 두 개의 카시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마트, 놀이터, 동물원, 도서관, 바닷가 등등 참 많이도 다녔다. 그래서 지호의 호주 사진 속에는 늘 이든이가 함께 있다는 거.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고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5년이라는 슬픈 공백이 생겨버렸지만.      




언니 주려고 바리바리 싸 온 물건들을 꺼내며 한껏 떠들다가, 문득 애들 쪽을 바라본다. 어색한 표정과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한 말투로 산타가 두고 간 크리스마스 선물을 같이 뜯어보고 있다. 뭐야. 이 분위기. 서로를 탐색 중인 건가. 그와 중에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대화. 이든이 입에서 영어가 나오면 지호는 일단 동공이 살짝 흔들리고, 이내 우리말로 대답한다. 참 신기하게 대화는 통한다. 두 녀석들 아기 때 모습도 떠오르면서 웃음이 절로 나는군. 그래. 시간이 약이지. 부디 5주 동안 다시 좋은 친구가 되기를. 제발 심하게 싸우지만 말고. 제발.





아이들은 지나치게 신나거나 긴장을 하면 말과 행동이 커지고, 꼭 하지 않아도 될 말도 한다. 지호는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이지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 이든이도 일 년 전보다 더 개구진 거 같네. 망가진 표정 웃긴 말투. 저런 면이 있었나. 전이든이 이상한 표정으로 장난을 치면, 이지호는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더 이상한 표정과 행동을 한다. 개그 배틀인가. 안 그래도 높았던 지호의 목소리는 한 톤 더 올라간다. 과하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이런 불편한 마음을 읽은 언니가 재빨리 점심 사러 나가자고 내 팔을 잡아당긴다.      





소심한 나와는 정반대인 정민언니. 내 우려를 알아채고 애들에게 시간을 좀 주자고, 자연스럽게 서로 잘 맞춰갈 거라고, 너무 신경 쓰지 말잖다. 그렇게 나를 차에 태운 언니는 예전 우리가 살던 집 앞도 지나고 자주 가던 놀이터도 지나고, 동네 드라이브를 한다. 5년 전 아주 보통의 날들처럼.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짐을 풀고, 마트에서 필요한 것도 사고, 애들이랑 집 앞 공원에서 걷고 놀고. 쉬엄쉬엄 그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자려고 누우니 아까 낮에 봤던, 평소와 좀 다른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첫날이라 그랬나? 새로운 환경이라 그랬겠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지호야, 여기 오니 어때?”

“엄마, 호주 너무 좋아.”

“그래 엄마도 오랜만에 오니 너무 좋아. 지호랑 이모랑 같이 있으니 더 좋고. 근데 지호가 신나니까 목소리도 커지고 장난도 더 심해지는 거 같아. 우리 조절 좀 해볼까?”      


내가 참 예민한 엄마라 예민한 아들에게 최대한 덜 예민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잘 알아듣고 잘 조절하길 바랐다. 하지만 8살 아이를 향한 나의 바람은 그냥 바람일 뿐. 종일 지호 이름을 불러대다가, 내 목소리는 점점 피치를 올리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결국 나는 헐크로 변신했다.      


우리의 한 달 살이. 무사히 5주를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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