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가서 굳이 한국인 파닉스 수업을
"지호 오면 파닉스 특강 들어볼래?"
남편을 설득해서 겨우 시드니행 티켓을 끊고 나니, 정민 언니가 괜찮은 기회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현지에서 워낙 소문난 선생님이라 언니도 아들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땐 시간이 안 맞았었다고.
"아.. 파닉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과 가격을 알아봐 달라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파닉스를 꼭 해야 하나? 호주까지 가서 굳이, 한국인 파닉스 수업을 해야 할까?
호주에서 태어난 지호는 세돌이 되기 전에 한국으로 왔다. 호주에서도 대부분 한국어에 노출이 되었지만 언어 발달이 좀 늦은 편이었는지, 또래보다 우리말도 서툴렀고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그땐 의식적으로 모국어에 더 집중했었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살게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4살이 된 아들은 어린이집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초보 엄마는 그제야 '엄마표 영어'를 알게 되었다. 나는 늘 그랬듯 엄마표 영어도 책으로 배웠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좋아할 만한 영어 동화책을 사서 읽어주고, DIY 영어 교구도 정성껏 오리고 붙여서 게임도 하고, 신나는 영어 노래를 부르며 같이 춤을 췄다. 잘 따라오는 듯했다. 이렇게만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 “엄마 나 영어가 싫어요.”
이건 아직 읽은 적이 없은데. 어쩌나. 영어를 거부하기 시작한 아들은 내가 영어책을 가져와 읽으면 책을 덮었고, 영어로 몇 마디 할라치면 작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영어가 왜 싫어졌을까?” 물었더니 자기는 한국인이라서 한국말을 해야 한단다. 말도 안 되는 이 소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도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모르는 척 기다리며 대책을 강구했다. 다시 좋아하던 노래도 틀어보고 잘 보던 책도 들이밀어 보았지만 의외로 완강했다. 그렇게 나의 엄마표 영어는 탄력을 잃고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잠정적 휴무.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호주 여행을 앞둔 지호는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코앞까지 오니 조바심이 생긴다. 욕심이 많은 엄마지만 이중언어까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영어를 배우고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보기보단 의사소통하는 언어 그 자체로 처음엔 접했으면 한다. 그래서 이번 한 달 살기를 더 고집했는 지도 모르겠다. 올해 내내 이 영어 거부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나름의 영어 준비 운동을 성실히 행했다. 덕분인지 영어 정서가 많이 올라왔는데, 뭔가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한 느낌. 이번 여행을 통해서 영어를 하고 싶은 이유를 찾아주고 싶다. 파닉스 수업.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언니가 추천한 현지 파닉스 수업은 한국인 선생님이 가르친다. 호주에 있는 많은 한국인 가족들이 집에서는 주로 모국어를 쓰기 때문에 초등입학 전후로 파닉스를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단다. 우리 때는 소위 좀 사는 집 친구들이 윤선생 파닉스를 했던 거 같은데, 난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영어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그 규칙이 익혀진 터라, 6개월에서 일 년 동안 배우는 대형 학원의 파닉스 과정엔 솔직히 의구심이 들었다. 발음 규칙을 알면 정말 큰 도움은 된다. 하지만 그 규칙을 익히기 위해 영어가 즐겁지 않다면 그건 반대다. 나도 내 아이가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고, 나처럼 영어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겉으론 학원 안 보내는 쿨 한 엄마로 볼 수 있으나, 막상 안을 들여다보면 아니다. 마음은 학구열 강한 여느 엄마 못지않다.
의심과 욕심이 마구 줄다리기를 하다가 한 달 살기 계획이 명확해지자 눌러져 있던 욕망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다. 처음엔 영어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만 기대했다가, 현지 영어 수업도 한번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되는 수업까지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아직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도 구분 못하는 아들이 들을 만한 수업이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 시각을 좀 바꿔보자. 이 특강을 듣는다면 다른 과정에 비해서 비용 부담도 적고, 한 시간이지만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다. 하루 한 시간 자유의 몸. 이만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우아하게 혼자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된다면, 파닉스 아니라 파닉스 할아버지라도 보내야 한다. "언니, 그 수업 신청해 줘요. 마음 바뀌기 전에." 욕심이 의심을 이겼다.
주 3일, 4주간의 특강 과정 중, 우리는 일정상 첫 일주일은 빠진다. 두 번째 주차부터 총 9번의 수업을 듣게 되는데, 9시간으로 큰 걸 바라지 않는다. 양심 있는 엄마니까. 그저 주어질 자유시간에 감사하고, 일 년 동안 애써 끌어올려놓은 영어에 대한 재미와 흥미만 잃지 말기를 바란다.
호주 도착 이틀 뒤, 드디어 파닉스 첫날이다. 영어 수업 들으러 간다는 얘기에도 어쩐지 고분고분하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 가자고 하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핑계가 어지간할 텐데, 고작 이틀이지만 다들 영어를 쓰는 환경에 있으니 생각이 좀 바뀌었나 보다. 이 또한 감사할 일.
호주에선 만 5세부터 학교를 가니깐 그 나이 전후의 아이들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다. 그 점이 살짝 우려스러워 지호에게 미리 알려두었다. 동생들이 많을 거라고 당황하지 말라고. 첫날 수업을 가보니 역시 예상대로다. 그래도 지호 또래도 한 명 보이고 한두 살 많아 보이는 형도 있다. 다들 우리처럼 나름의 사정으로 이 자리에 있겠지. 다양한 연령과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애들이 들어가자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몇백 배 빠른 걸음으로 같은 건물 카페로 향한다. 5분, 10분이라도 더 혼자이고 싶다. 옆에서 말 시키는 사람 없이 나 홀로 들이키는 진한 롱블랙의 맛이란. 달고 달았다면 믿지 않으려나. 다이어리도 끄적이고 일정 체크도 하고 멍도 때리고. 이번 여행 중 나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이다. 일주일 세 번이지만 정해진 시간과 목적이 있는 외출이 있다 생각하니 앞으로의 부담과 걱정도 좀 옅어지는 거 같다.
첫 수업을 하고 나오는 아들의 표정이 제법 밝다.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선생님과 잠시 스몰톡 할 시간이 있었는데 지호가 원래 공부하는 걸 좋아하냐고 물으신다. "아,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기보단, 뭔가 배워서 아는 체하는 건 참 좋아합니다." 길고 긴 여행 끝에 지호와 정말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나건지, 톡으로 보내주신 사진들 속에서 지호가 활짝 웃고 있다. 수업 시간에 게임으로 했던 작은 종이쪽지도 호주 기념품이라며 트렁크 주머니에 고이 모셔둔다. 어쩌다 배운 단어가 나오면 따라 하기도 한다. 이게 웬일이냐. 나 정말 계 탄 거 아냐.
또 한 번 깨닫는다. 나의 생각과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고정관념을 경계하자.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지 말자. "엄마는 아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절대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면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