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동물원을 가다
두두둑. 두두둑.
출발 한지 10분쯤 지났을까 흐렸던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앞을 보기도 힘들 만큼 세찬 빗방울. 큰 도로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다. 동물원을 향해 가던 길에 뜻하지 않은 휴식. "호주에서 제일가고 싶은 곳이 어디야?" 도착한 날 이모의 물음에 아들은 고민 한번 하지 않는다. "오페라하우스와 동물원" 오전에 일을 마치고 온 언니가 외친다. 오늘은 모두 Zoo로 출발.
호주 살 땐 선택의 여지없이 타롱가 동물원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떠난 뒤 새로 생겼다는 시드니 동물원으로 가보기로 한다. 집에서 조금 더 가깝기도 하고 언덕이 없고 규모도 적당해서 구경하기 좋단다. 그리고 대륙별 테마별로 동물들도 모여 있어서 동선이 훨씬 편리하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 한 달 살기 동안 두 번 이상은 갈 거라고 이번에도 우리는 연간 회원권이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잠해지자 다시 달리기 시작해 시드니 동물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쌀쌀한 공기에 온몸을 움츠린다. 분명 날씨와 온도를 체크하고 나왔건만 그새 반팔 반바지가 무색한 기온 변화. 역시 호주 날씨다. 얇은 가디건 하나 챙겨 오지 않은 나를 탓하며 기념품 샵으로 직진한다. 애들이 고른 후드티 두 개를 계산하고 입히고 나니 이내 찾아온 마음의 평화. 지도를 하나씩 나눠가지고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어린이 카메라도 목에 장착하면 탐험 준비 끝. 두 아이는 미션 수행을 앞둔 정예요원처럼 잔뜩 신이 나 있다. 길이 익숙한 이든이가 선두에 서고 바로 뒤를 지호가 콩콩 뛰며 따라간다. 나랑 언니는 아이들이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며 슬렁슬렁 걸어본다. 이렇게 여유로운 동물원 구경이라니. 짐이 주렁주렁 달린 유모차 끌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애들 쫓아다니던 5년 전이랑 참 다르다.
2017 - 2018년의 타롱가 동물원. 원래 동물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쳐서 오늘 하루는 뭐 하며 보내나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이 아이만 내 품에서 떨어져 논다면 놀이터든 동물원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야무지고 똑똑했던 나의 공동 육아 동지들이 동물들을 보여주기 좋은 때라 해서 나도 덩달아 회원권을 끊었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타롱가 주는 오르락내리락 언덕길, 구불구불 숲 길, 그리고 기저귀 갈 수 있는 수유실이 잘 되어 있었다는 것. 유모차 끌고 다니기 괜찮았지만 평지만 있는 게 아니라 체력이 떨어지면 힘들었다. 그 와중에 아이가 걷겠다고 우겨 내려놓으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 한 손으로는 어디론가 튈지 모르는 아이 손을 놓칠세라 꽉 잡고 나머지 손으론 짐을 실은 유모차를 붙잡고. 내가 유모차를 끄는 건지 유모차가 나를 끄는 건지.
집에 와서 생각나는 동물들도 매번 똑같았다. 동물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였던 키가 큰 기린과 카페테리아 근처에 있었던 코끼리들. 시간을 잘 맞추면 물개쇼도 볼 수 있었는데 답답한 걸 싫어하는 지호 덕에 사람들 틈에서 앉아 물개를 볼 수 있는 휴식도 나에겐 주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2년 동안 동물원 강행군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타롱가 동물원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 때문이다. 시드니의 탁 트인 하늘과 눈앞에 펼쳐진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뷰는 육아의 피곤함이나 어떤 심각한 고민조차 잠시 잊을 만큼 평화로웠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정말 호주스러운, 시드니다운 동물원인 타롱가 주. 써큘러키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올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색다른 경험에 한몫할 수 있지 않을까.
타롱가 동물원이 대자연 속에 넓게 펼쳐져 있다 생각하면, 시드니 동물원은 잘 계획되고 정돈되어 있는 느낌. 섹션이 잘 나누어져 있어서 아이들 스스로 동선을 짜기에도 좋고 동물들도 비교적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크지는 않지만 아쿠아리움도 있어서 물고기와 해마 같은 수중 생물도 있고 상어도 볼 수 있다. 어두운 실내 파트에는 파충류와 양서류 그 밖에 야행성 동물들도 있다. 무엇보다 지호가 기대했던 캥거루, 왈라비, 에뮤, 웜벳 같은 호주 동물들을 거의 오픈된 공간에서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게 가장 매력적이다. 코알라와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지호의 이번 여행 버킷리스트. 운이 좋게도 깨어 있는 코알라를 만났다. 열심히 유칼립투스를 먹는 동글동글 인형 같은 코알라. 너무 귀엽다. 작은 캥거루 버전인 왈라비들은 우리 옆을 마구 뛰어다닌다. 마치 좋아하는 손님이 집에 왔을 때의 아이들처럼.
호주 여행 5주 동안 우리는 세 번이나 시드니 동물원을 찾았다. 첫날은 전체적으로 다 훑어보고 그다음부턴 경험을 바탕으로 둘이 미리 계획을 세우는 치밀함. 두 번째 갔을 때는 긴 기다림 끝에 레서 판다 보기에 성공하고 파충류와 양서류관에서 떠날 줄을 모르더라. 마지막 날엔 미뤄뒀던 관람차도 타보고 호주 동물들 쪽에서 오래 머물렀다. 타조와 닮은 에뮤를 정말 가까이서 보았고 왈라비들을 쫓아다녔다. 때마침 사육사가 데리고 나온 ‘블루텅 스킨크’라는 도마뱀도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파충류 덕후인 지호에게 정말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
타롱가 동물원과 시드니 동물원은 규모가 큰 만큼 안에 카페테리아가 여러 개 있지만 음식의 맛과 질은 크게 기대하지 말자.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니 간단한 간식이나 도시락을 준비해 가면 좋다. 대신 호주 새들이 그 음식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명심하길. 머리가 좋은 새들은 겁도 없어서 한순간에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샌드위치도 가져가 버린다. 처음의 그 당혹스러움을 잊을 수 없다. 반드시 지퍼가 있는 가방 같이 안전한 장소를 확보해서 소중한 식량을 빼앗기고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동물원에 가본 적이 없다. 차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서울대공원조차 데려간 적이 없으니 말 다했지. 이렇게 동물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니 어쩐지 미안하고 짠하다. 하지만 엄마가 동물 책은 많이 사주었잖아. 그래서 지금 더 큰 감흥이 있을지도. 혼자 이렇게 정당화하기. 생물 학자를 꿈꾸는 지호에게 호주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동물들의 천국. 호주여행 다녀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 다시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보면 영락없이 시드니 동물원이다. 너의 마음에 보물이 하나 더 생긴 거 같아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