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와 신경전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 덮인 크리스마스이브. 우리는 저녁 비행기로 여름의 호주로 떠난다.
남편과 처음 만났던 나라. 애틋한 신혼 보냈던 나라. 아들이 태어난 나라. 그리고 다섯 해 전, 깊은 고민 끝에 떠나왔던 그곳. 그곳으로, 여덟 살 지호와 단둘이 여행을 결심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우린 하늘을 날고 있을 거야.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르지." 남편을 설득하느라 티켓팅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크리스마스 전날 떠나게 되었지만, 지호에겐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렇게 포장해 본다.
여행이 확정되자 나의 염려들은 잔소리가 되어 스멀스멀 올라온다.
호주에 가면 이든이 집에 있을 거야. 그 집 규칙을 따라야 해. 이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이모랑 삼촌 말도 잘 들어야 해.
"아들, 잘할 수 있지?"
처음엔 귀 기울여 듣고 정성껏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도, 출발이 가까워지자 돌아오는 대답은 딱 하나. "네!" 아주 자신 있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 달 살이도, 너와 함께라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하룻밤을 꼬박 날아 비행기에서 내리니 익숙한 시드니의 공기와 눈부신 태양이 우리를 맞이한다. 지호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난 '이든이'의 엄마, 나의 또 다른 친정 언니 같은 '정민언니'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언니가 없었으면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었을까. 과연 다시 오고 싶었을까.
"정민이 이모~"
작년 겨울 한국에서 한번 만나서 그런지 지호도 낯설지 않은 듯 언니에게 달려간다.
크리스마스 당일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도로가 참 조용하다. 다들 어제 늦게까지 파티를 했겠지. 보통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스르륵 지나 4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어쩜 동네가 그대로야."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언니는 두세 번의 이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집에 올라가니 이든이와 이든이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이 집 아들과 그 집 아들이 다시 만났다.
둘은 태어났을 때도, 자랄 때도 참 달랐다. 지호는 예민하고 불안이 높고 뭐든 앞 뒤 생각 없이 덤벼들었고, 이든이는 순하고 여리고 조심스러웠다. 늘 형처럼 지호를 챙기던 아이.
그 시절 우리는 눈만 뜨면 만났다. 운전을 못하는 나 때문에 언니 차 뒷자리엔 두 개의 카시트가 늘 달려 있었고, 마트, 놀이터, 동물원, 도서관, 바닷가 등등 참 많이도 다녔다. 그래서 지호의 호주 사진 속엔 늘 이든이가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거리도 멀어지고 코로나까지 터져버리면서 5년이라는 공백이 생겨버렸지만.
언니 주려고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을 풀어놓으며 떠들다가 문득 아이들을 본다.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한 말투와 어색한 표정. 산타가 두고 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함께 뜯으며 서로를 탐색 중이다. 뭐야. 이 분위기는.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대화. 이든이 입에서 영어가 나오면 지호는 순간 동공이 흔들리지만, 이내 한국어로 대답한다. 신기하게도 대화는 통한다. 두 녀석들의 아기 때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시간이 약이지. 부디 5주 동안 좋은 친구로 돌아가기를. 제발 심하게 싸우지는 말기를.
그런데... 지호의 목소리가 슬슬 커진다. 어? 이든이도 예전보다 개구져졌다. 이상한 표정, 장난스러운 말투. 그러면 지호는 질 수 없다는 듯 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맞받아친다. 개그 배틀인가. 안 그래도 높았던 지호의 목소리는 이미 한 톤 더 올라간다.
과하다. 제발 그만.
내 불편함을 읽은 정민언니가 점심 사러 가자고 재빨리 나를 끌어낸다. 소심한 나와 정반대인 언니는 "애들에게 시간을 좀 주자, 자연스럽게 맞춰갈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라며 운전대를 잡는다. 예전 우리가 살던 집도 지나고, 자주 가던 놀이터도 지나고, 5년 전 아주 평범했던 어느 날처럼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점심을 먹고, 짐을 풀고, 마트에 들러 필요한 걸 사고, 집 앞 공원에서 걷고 놀고. 그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자려고 누우니 낮에 보였던 아들의 낯선 모습이 떠오른다. 첫날이라 그랬겠지? 새로운 환경이라 그랬을 거야.
뒤척이다가 아이에게 말을 건다.
“지호야, 여기 오니 어때?”
“엄마, 호주 너무 좋아.”
“그래 엄마도 오랜만에 오니 너무 좋아. 지호랑 이모랑 같이 있으니 더 좋고. 근데 지호야, 신나니까 목소리가 커지고 장난도 더 커지는 것 같아. 우리 조금만 조절해 볼까?”
예민한 아들에게 최대한 덜 예민하게 말하고 싶었다. 잘 알아듣고 잘 조절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여덟 살 아이에게 바람은 그냥 바람일 뿐. 며칠 지나지 않아 종일 지호 이름을 부르게 되고, 내 목소리도 피치가 올리다가, 결국 나는 헐크로 변신했다.
우리의 한 달 살이.
무사히 다섯 주를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