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엄마표에서 아이표가 되기까지 - 첫 번째 이야기
정답을 모르겠다
아니 정답이 없다. 인생과 육아의 공통점. 정해진 답이 없으니 더 답답하고 막막하다. 가끔. 아주 가끔은 잘 살고 있구나, 나 참 잘하고 있구나 싶다가도 돌아서면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은 기분. 아이는 태어난 이후로 계속 계속 자라고 어느 한순간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 터. 그런 아이를 따라가려니 시시때때로 숨이 차다. 특히 나 같은 어리바리한 초보엄마는.
되찾은 자유 그리고 시작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해 아들은 4살,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드디어 꿈꾸던 자유 시간이다. 주위 엄마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새로운 육아 세상을 만나게 된다. 엄마표 영어, 엄마표 독서, 엄마표 수학 등등 성공한 사례만 접하니 ‘엄마표’라는 말만 들어도 참 부럽고 멋있지 않나. 자존감이 내려가 있던 나는 이거다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어쩌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영어를 좋아하는 엄마의 엄마표 영어. 그 호기로운 시작. 성공한 선배맘들의 책을 보며 공부하는 시간도, 우리에게 맞는 영어 그림책과 교구를 고르는 시간도, 아이와 함께 그걸로 신나게 놀았던 시간도 나에겐 너무나 신선했고 특별했다. 내가 좀 괜찮은 엄마가 된 것도 같았다. 모든 시간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두근두근은 나만 그랬다. 아들은 아니고.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영어 하기 싫어요. ”
내 엄마표는 이렇게 망하는가
아들이 6살이 되고 영어를 거부하며 나의 엄마표 영어는 보기 좋게 끝나는 듯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정성껏 골라 모은 영어책과 교구들 그리고 내 엄마표 SNS 계정들. 모든 게 아까웠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어떻게 해서든 되돌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허둥지둥 또 어쩔 줄 몰라서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것. 가만 보자. 지금 내 아들이 빠져있는 건 우리말이었구나. 내가 책을 읽어주면 마지못해 같이 보던 지호가 한글로 된 책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같은 책을 보고 또 보았다. 그제야 나도보였다. 언어발달이 늦었던 아들이 이제야 입이 트여서 수다쟁이가 되었다는 것도. 단순히 영어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더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뿐이다. 아마도 내 아이에게는 두 가지 언어가 좀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너에게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한글 책을 붙들고 있는 아들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그제야 '영어거부', ‘영어거부 극복’ 같은 검색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이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지호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었다. 같이 읽기도 하고 읽어 주기도 했다. 포켓몬 도감도 샀다. 포켓몬 종류만큼 도감의 종류도 어찌나 많은지 원하는 걸로 여러 권 샀다. 우리는 포켓몬 타입과 진화 그리고 상성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게 더 많았던 엄마가 질문을 하면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신명 나게 설명을 하는 게 아닌가.
이걸로 한글을 해볼까?
뭐 하나 잡은 거 같으니 엄마의 머리가 다시 팽팽 돌아간다. 1. 포스트잇에 포켓몬 스티커를 붙인다. 2. 도감 찾아 이름을 따라 쓴다. (쓴다는 것보단 한글을 그린다는 말이 맞겠지만.) 3. 완성되면 거실 벽에 붙인다.
단순한 이 과정이 지호에겐 세상 재미있는 놀이였나 보다. 써서 붙이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한쪽 벽이 포켓몬으로 채워졌다. 그걸 바라보는 지호의 눈에서 나는 뿌듯함을 보았다. 이름을 적으며 반복된 글자를 익히더니 이내 한글도 곧잘 읽는다. 도감도 혼자 읽기 시작했다. 포켓몬이 도우사 나는 입학 전 한글 고민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전한 고민과 작전 변경
물론 그 와 중에도 영어에 대해 고민이 없었다면 분명 거짓말이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지는 날이면 나는 영어책을 꺼내 들었다. 작전 변경이다. 아이의 공부가 아닌 엄마의 공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고 싶으면 먼저 책을 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가 영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싶었다. 난 원래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언어라는 것이 배우면 배울수록 부족함이 느껴져서 이 또한 내 공부의 좋은 동기가 되었다. 간단한 온라인 영어 수업도 일부러 지호가 집에 있는 시간에 들었고 설거지를 할 때는 좋아했던 미드를 틀어놓기도 했다. 영어책을 일부러 소리 내어 읽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호가 7살 땐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고 일부러 모든 자료가 영어로 된 국제협회를 선택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교재들을 온 집안에 널어놓고, 노트북으로는 수시로 운동 동영상을 보며 공부하는 티를 팍팍 냈다. 쓱 보고 그냥 지나가는 날도 있었고 한참을 옆에서 지켜보는 날도 있었다. 자격증 시험이 임박해 오니 내 공부가 급하긴 했으나 아들의 공부를 걱정할 여유조차 없음에 감사했다. 덕분에 일시적이었지만 잔소리 안 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으니까. 이 모든 노력들이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다.
엄마의 연기력이 필요한 날도 있었다. 영어로 된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고 싶었지만 지호는 늘 우리말 더빙을 고집했다. 거기에 맞춘 엄마의 새로운 꼼수. 아들이 좋아하는 영화 중 영어 버전을 결제해 놓고 여유로운 주말 아침을 기다린다. 먼저 일어나면 티비가 없는 거실에 캠핑 티비를 설치하고 좋아하는 장면을 맞춰놓는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방에서 기척이 들리면 얼른 영화를 틀어서 내가 보고 있는 척. "아들 일어났어? 엄마 보던 거 좀 마저 볼게. “ 그러면 눈을 비비며 내 무릎에 앉아 군소리 없이 끝까지 시청하는 우리집 청개구리.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자식 키우는 일에 있어선 확실히 그런 거 같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 영어 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위 잘 사는 집의 경제력을 부러워한 적도 있고 영어 학원 가방을 메고 달려가는 친구들을 보면 저렇게 하면 될 것을 내가 너무 유별난가 싶기도 했다. 특히 남편은 사교육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는 어떠한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힘'이다. 지호가 영어를 좋아하게 되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기꺼이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그 힘을 갖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 하나다. 조금은 미련해 보이는 이 길에서 나는 내 아이의 때를 기다린다. ‘영어는 초등학교 가서도 늦지 않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하루를 더 버텨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영어 준비 운동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