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나송 Dec 10. 2024

나는 숨 쉬는 법을 배웠다

음악을 위한 숨, 삶을 위한 호흡

선생님은 항상 프레이즈와 호흡을 강조하셨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처럼,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예를 들어가며, 음악에서도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늘 하시던 말씀,


노래해 봐.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어.
들숨과 날숨이 있어야 음악에 생명이 생긴단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잘 와닿지 않았다. 숨은 자연스럽게 쉬는 것이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연습실에서 첫 위클리 연주를 준비하던 시절, 그 말씀이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연습에 매달려 소리는 낼 수 있었지만, 음악이 살아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손가락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연주를 멈추고, 한 소절만 허밍으로 불러봐.
그리고 숨을 어디에서 쉬고 싶은지 느껴봐.


어린 나이에 어리둥절했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건반 소리보다 크게 멜로디를 불러보았다. 작은 숨이 필요한 곳에서는 짧게, 긴 호흡이 필요한 곳에서는 한껏 여유를 두고 숨을 들이마셨다. 머리로만 쉬는 숨이 아니었다. 정말 폐를 움직여 코로,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노래를 하자 음악이 다르게 보였다. 악보가 입체적으로 보이고, 들리지 않던 부분들이 새롭게 들려왔다. 마치 음악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집중도 훨씬 잘되었다.


허밍으로 노래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너무 서둘렀고, 숨을 놓친 채 달려왔다는 것을. 숨을 쉬며 멜로디를 따라가니, 음악의 문장이 비로소 내게 다가왔다. 그 후로 나는 피아노 앞에 앉기 전에 먼저 노래하고, 그 숨결에 따라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첫 연주를 마친 그날 밤,  심호흡하며 선생님이 늘 말씀하셨던 '숨을 쉬어라'는 가르침을 곱씹었다. 그제야 그 말씀이 단순히 연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호흡은 음악뿐 아니라 삶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삶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한숨 돌리는 시간이 없으면 금세 숨이 차고 만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면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도 잊어버리기 쉽다. 음악에서 호흡을 찾기 위해 허밍으로 노래를 하듯, 삶에서도 나만의 호흡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종종 이어폰을 끼고 산책을 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피아노 앞에 앉아 찬송을 부르며 나만의 호흡을 찾는다. 바쁜 하루 중 잠시 멈추어 좋은 문장을 필사하거나, 좋아하는 책의 한 페이지를 천천히 읽는 시간도 나에게 쉼표가 되어준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삶의 리듬을 되찾게 해 준다.


음악에서 호흡이 다음 문장을 더 풍성하게 이어가기 위한 준비이듯, 삶의 호흡도 멈춘 뒤 다시 나아가기 위한 여유를 준다. 숨을 고르며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다음 걸음을 위한 힘을 얻는다. 이렇듯 삶에서 호흡은 그저 멈추는 것이 아니다.


결혼과 육아는 나에게 커다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완전히 달라진 삶에서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나의 시계는 아이를 축으로 움직였고,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으로 틈틈이 수업과 레슨을 하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저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이 주는 버거움, 밤마다 피로에 지친 채 작은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를 마주하는 시간은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마주한 것은 육체적, 정신적 피로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대 위에 놓인 곡의 멜로디를 허밍으로 불러보았다. 그렇게 숨을 쉬고 나면, 갑자기 음악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연습실에서 음표에 맞춰 호흡을 찾아가다 보면, 어쩐지 그 고단했던 하루 속에서도 숨을 쉴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숨을 찾아가다 보면 삶에도 작은 쉼표가 생기는 듯했다. 조금만 숨을 고르면 마치 내 안에 멈춘 시간들이 다시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노래는 숨을 쉬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단지 음악의 기술을 넘어 삶의 본질을 일깨웠다. 숨을 들이쉴 때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쉴 때 그 소리를 타인과 나누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연주는 단순히 감동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듣는 이와 함께 호흡하며 공감의 순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숨을 쉬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숨결 속에서 내 삶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음악에서 호흡을 찾기 위해 노래를 연습하듯, 삶에서도 나만의 호흡을 찾아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디에서 멈추고, 얼마나 숨을 고르며, 왜 다시 나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더 깊은 리듬으로 살아 숨 쉬게 된다.  


음악에서 호흡이 다음 문장을 이어가기 위한 준비라면, 삶의 호흡은 멈춘 뒤 다시 나아가기 위한 여유다. 멈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런 호흡이 있어야만 내 삶의 리듬이 살아나고, 내가 진정 원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건반 밖 엄마, 서나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