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긴다는 것
어떤 일을 끝내고 나면 항상 불안이 찾아온다. ‘내가 제대로 했을까? 더 잘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같은 질문들. 연습실에서 연주를 준비할 때도, 아이를 키우며 결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도 이런 마음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끝까지 통제할 수 없는 결과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까?
"도예가는 흙을 고르고 모양을 만들고 물레를 돌리고 무늬를 넣고 시유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기물들을 가마 안에 지어 넣고 나면 더 이상 그가 할 일은 없다. 이제 가마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은 도자기를 만든 도예가가 아니라 불이다."
_ 이승우 <고요한 읽기> 중에서
도예가는 흙을 빚고 무늬를 넣으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작품을 가마에 넣는 순간, 그의 손은 더 이상 닿지 않는다. 모든 것은 불에 맡겨진다. 불의 온도와 시간 속에서 흙은 변하고, 도예가는 단지 그 과정을 기다릴 뿐이다.
음악도 그렇다. 연습실에서 나는 끊임없이 음악의 조각들을 맞춰간다. 악보의 작은 음표 하나가 지닌 의미를 찾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한다. 손끝의 터치 하나, 숨을 쉬는 타이밍 하나까지 점검하며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러나 무대에 서는 순간, 그 곡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히 준비해도,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나의 손을 넘어선 무언가다. 연습실에서 흘린 땀과 시간이 무대 위에서 불꽃처럼 타오를 때, 음악은 그제야 온전히 살아난다. 나의 손을 떠난 음악은 불 속의 도자기처럼 스스로 형태를 찾아간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를 빚으며 작은 무늬를 새긴다. 밥을 짓고, 손을 잡아주고, 수많은 사소한 일들을 반복하며 아이의 하루를 만든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나는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 최선을 다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 하루는 내가 손을 놓은 뒤에서야 완성된다. 아이의 발걸음이 세상에 남긴 흔적 속에서,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그의 삶은 스스로 제 온도를 찾아간다. 아이의 삶을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때, 나는 내가 도예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흙을 빚는 데까지가 나의 몫이라면, 가마 안에서 흙이 도자기가 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사실 완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모든 시간과 과정을 포함한다. 마치 도자기가 뜨거운 불 속에서 제 형태를 찾아가듯, 음악도 무대 위에서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을 품고 있다. 연습실에서 쌓아온 시간은 곧 나의 인내의 불이었고, 그 불이 없었다면 음악은 무대에서 빛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완성’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결과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완성은 나의 손을 벗어난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은,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숙명 아닐까?
삶의 대부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불 속에 있다. 도자기는 불 속에서 형태를 얻고, 음악은 무대 위에서 생명을 얻으며, 아이는 나의 손길을 벗어난 자리에서 성장한다. 불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내가 빚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기에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다. 내가 손을 놓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 불은 나의 노력과 기다림을 결실로 바꿔준다. 결국 삶의 완성은 나의 손끝을 벗어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기다릴 수 있다면, 그 불은 결국 내가 빚은 것을 완성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건반 밖 엄마,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