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어금니는 꽉 깨물고 이보다 무서울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내 아들 손에 들려있는 책, Stink! 를 빼앗아 그대로 집어던졌다.
머릿속에서는 ‘나 자신아!! 이러면 안..ㄷ’라고 외치고 있는데 머리보다 손이 더 빨랐다.
던진 책이 내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도 놀랐지만 난데없는 엄마의 폭발에 아이는 놀란듯하다. 재빨리 표정관리를 하고 아이의 얼굴을 슬쩍 보니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얼음처럼 굳어 방구석에 마음대로 펼쳐진 채 뒹굴고 있는 그 책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아이가 집중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책을 있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사실 이렇게까지 화낼 건 아니었는데 오늘 오전에 만난 선우엄마가 문제였다.
“지운엄마~ 요즘 지운이 영어책 뭐 읽어요? 우리 선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영어책이 재밌다고 하더니 지난달에 15만 단어 넘게 읽었잖아요 호호호. 좋은 방법 잘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건 감사인사인가, 자랑인가. 저 말하려고 그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온 건가?
앞동에 사는 선우는 우리 집 아이보다 더 늦게 영어책 읽기를 시작했고, 선우엄마가 어려워하는 순간마다 몇 년간 고군분투하며 쌓아온 내 노하우를 정성껏 전해줬다. 지운이가 영어책 읽기를 습관화하는 게 정말 어려웠기 때문에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해 보며 정리해 놓은 내 방법들이었는데...
분명 엄마표 영어를 시작할 때는 우리의 속도에 맞춰,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가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 욕망의 씨앗은 소리도 냄새도 없이 어디서 움을 틔었던 것일까.
나는 우리 아이보다 먼저 치고 나가는 선우에게 해사하게 웃으며 마냥 축하해 줄 수는 없었다. 아마 ‘어머, 축하해요. 선우 너무 잘하네’라고 영혼 없이 대답하는 내 얼굴이 아마 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속이 쓰릴 줄 알았으면 잘난 척 섞인 내 꿀팁을 전수해 주지 말고 꽁꽁 싸고 있을 걸 그랬다. 이렇게 남의 행복에 기분 상한 내가 싫고, 그로 인해 감정적인 모습으로 책을 던져버린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와 대화도 많이 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엄마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지냈는데 그토록 보이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나의 엄마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결국 아이 앞에 보이고 나니 벌거벗은 것 마냥 너무 창피했다. 사실 우리 엄마도 내가 어렸을 때 방학마다 다음 학기 응용수학 문제집을 나에게 풀리며, 설명한 걸 못 알아듣거나 멍하게 있을 때마다 문제집을 집어던지거나, 좍좍 찢어버리고는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무섭고 싫었으며 어린 시절 일들을 떠올려보자면 제일 먼저 찢긴 문제집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내 모습이 기억나기에, 그 행동만은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책을 집어던진 내 손이 원망스러웠다.
한껏 기죽어 있는 아이가 안쓰럽고 너무 미안해 당장 안아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다가가 안으며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지킬 앤 하이드 같은 엄마가 더 공포스러울 것 같아 한 발짝 떨어져 있기로 했다.
"여기 꽂혀 있는 책들 중에 지운이가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아보고 있어."
사실 책을 진짜 찾게 하려는 것보다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의 기분을 환기시키고, 나 또한 설거지를 한다는 핑계로 뒤돌아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을 위해 이 험난한 길을 내가 스스로 걸어 들어왔나 다시 돌아봤다.
No! 비교
No! 조급증
No! 의심
비교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의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온전히 아이와 나의 속도를 맞춰서 잘 걷기로 한 처음 마음을 들춰봤다.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가 일곱 살 때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매일 책을 읽어오며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실력이 급격히 오를 때의 그 희열을 느낀 지 꽤 오래되어 '정체'되어 있다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었다.
사실 열 살 때 이 책을 읽나, 열세 살에 이 책을 읽나 결국 읽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분명 처음의 마음에는 아이가 학원을 거부하니, 집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영어책이든 한글책이던 재미있게 읽자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내가 무서운 표정으로 책을 집어던져버리면 아이는 저 책이 좋겠냔 말이다!
어른인 나도 책이 휘리릭 읽히는 날이 있고, 글씨 한 자 한 자가 까끌거려서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도 있는데 아이에게 매일 한결같은 모습을 바라는 것 자체가 잘 못된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끄집어낼수록 나 자신이 부끄러워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열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아이의 성격이다. 조급하고 긴장도 높은 엄마에 비하면 훨씬 온화하고 느긋하다. 그런 아이는 오늘 읽고 싶은 책을 골라봤다며 플리마켓에 중고책 팔러 나온 동네 주민처럼 책 앞에 앉아 나를 부른다. 미소 띤 얼굴, 조심스러운 목소리, 모든 게 고맙고 사랑스럽다.
아이는 이렇게 다시 영어책을 고르며 엄마인 나를 용서하는데, 늘 감정이 앞서는 어른인 내가 못내 부끄럽다.
생각만 말고 사과를 해야지. 책 집어던지고 갑자기 화내서 미안하다며 꼭 안아주었더니 아이가 더 세게 꽈악 나를 안아준다.
“아니야, 엄마. 내가 더더더 미안해. 내가 더더더 사랑해.”
못난 엄마는 고마움과 미안함에 잠시 숨이 멎는다.
그래, 그깟 갱지책 조금 늦게 읽으면 어때. 그림 많고 색깔도 많고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책 많이 읽으면서 조금 늦더라도 우리 한 발씩 손잡고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