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팀장'인 그녀와의 접점을 줄이고, 오늘 올려야 하는 결재는 조용히 묵혀놓았다가 내일의 나에게 넘겨주자.
일단 오늘 살아야 내일이 있는 것이니.
아침부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기가 뒤틀렸는지 짜증 반, 비난 반이 섞인 혼잣말을 소곤소곤 오십문장정도 내뱉고는 자기도 목이 아픈지 잠잠해졌다.
그녀의 혼잣말은, 정말로 자기 혼자하는 말인지 팀원들에게 직접하는 말인지 그 어투와 목소리 크기가 너무나 비슷하여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다. (소곤소곤 혼잣말로 비난하고 그 목소리대로 대화도 하기때문에 우린 그녀를 "소곤녀"라 부른다.) 오늘따라 짜증이 특히 심한 소곤녀의 공기반 소리반 혼잣말 덕분에 오전 11시도 안되었는데 난 이미 지쳤다. 그녀가 뱉어내는 쓰레기 같은 부정적인 말들로 절여진 기분이다.
누가 그랬지. 부정적인 말을 계속 들려주면 식물도 말라죽는다고. 난 그말에 이제 백프로, 아니 천이백프로 동의하기로 했다!
내 입으로 말한마디 하지 않고도,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도 귓가에 소곤소곤 들리는 문장들로 이렇게 피로할 수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팀장님, 업체에서 제품 결함으로 우리가 작년초에 샀던 물건값을 환불해 주기로 했답니다. 대신 전액인 60만원에는 안되고, 사용연수 계산해서 40만원까지 해준다고 하네요. 괜찮을까요?"
"아니. 뭐 그런식으로 일을 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이가 없네? 업체가 한다면 다 해줄거에요? 그런걸 뭘 나한테 물어봐요. 전화해서 강하게 말을 해봐야 할거 아니에요 강하게!참나..후우(절레절레)"
이미 상대업체 직원에게 나는 '진상'으로 낙인찍혀 있다. 제품 이상과 환불문의로 한 달 보름 동안 수십통의 전화를 했고 부탁도 하고 회유도 해서 (그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최대한 우리에게 좋게 입장 정리를 하고 보고를 한 것이었다.
사실 내 자리는 소곤녀 팀장과 자리가 멀지 않아 그녀도 내가 얼마나 상대직원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는지 다 들어왔다. 환불 불가였는데 이것저것 규정을 찾아가며 이렇게라도 받게 되었던 것도 알고있다.
소곤녀는 1년 반도 넘게 사용한 제품을 전액 환불 받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다 알고, 그 좋은 귀로 다 듣고 있었다.
그런데도 업체직원에게 더 강력하게 클레임을 걸어서 해결을 하라고 나를 압박을 하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사기업도 아니고 이익을 창출하는 회사가 아니기에 작년에 사용한 그 돈이 올해 다시 들어온다고 크게 득이 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소곤녀는 마치 닭싸움을 지켜보는 주인처럼, 본인 팀의 직원이 다른 거래처와 갈등을 겪는 것을 보는 것을 매우 좋아라한다.
월급쟁이 별 수 있나. 하라면 해야지.
20분의 설득에도 굳건한 소곤녀의 고집에 못이겨 결국 업체 직원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최초의 요구대로 전액 환불을 원한다고 요청을 했다.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갑질도 이런갑질이 없고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울화통이 터진 상대방 직원은 결국 전화통에 대고 욕설을 했고, 나는 누군가에게 욕을 먹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자기 자리에 앉아 옅은 미소를 띄며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소곤녀는, 통화 후 녹초가 되어 머리통을 감싸쥐고 책상 위로 구겨진 나를 불러
"그럼 그냥 40만원 받죠. 60받으면 처리하기는 더 쉽긴하지만 사실 억지스럽긴 하지"
와. 혼자 세상 쿨하다. 10분전까지 전액 환불 다 받아오라고 미션 던지던 사람은 어디갔나.
오늘의 전투를 보고나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목소리도 한결 가볍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싸움구경을 즐기는 소곤녀다.
이렇게 직원들의 일에 하나하나 참견하며 분란을 만들어놓고
"어쩜 이 팀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일이 끊이질 않는다. 정말. 쯧쯧"이라며 혼자 고귀한 척을 다 하는 미스터리한 그녀.
다 너님 때문이라고요.
라고 귀에 힘차게 외쳐주고 싶다.
본인 손에는 흙 한톨 묻히고 싶진 않으면서 다른사람을 조종해서 상대방을 떠보거나 싸우는 것을 지시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못하고, 하나에 꽂히면 싸워서 누구하나 스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