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싫어한다.
전직 은행원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은행 쪽으로는 머리를 두고 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은행은.. 별로다.
10년 넘게 싫어하던 '은행'이라 그런지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도 싫기는 매한가지다.
은행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나무가 많은 우리 동네에 은행 향기가 퍼지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프다.
걸을 때도 앞이 아닌 땅을 보고 걸어야 하고, 자전거라도 탈라치면 땅에 떨어진 은행을 피해 갈지(之) 자로 운전해야 한다. 잘못하다 밟기라도 하면 오늘은 운동화 빨래 당첨이다.
오감이 민감한 우리 아들은 길을 걸으며 "엄마, 똥냄새가 너무 지독해"하는 말을 연신 내뱉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행은 가을이 익어감을 알리는 소리 없는 총성이다.
걸음도 편하게 못 걷고 이토록 성가신 은행이지만, 어느 순간 똥냄새 같은 이 향이 느껴지면 또 한 해가 속도를 내어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왠지,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조용히 차 한잔 해야 할 것 같고 책장 제일 아래칸에 밀어놓았던 책을 펼쳐 몇 장이라도 읽어야 할 것만 같다.
이뿐인가.
1월에 쓴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분명 올해는 3kg을 빼기로 결심했던 과거의 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공포감을 느끼며 올라간 체중계를 보며 3kg이 더 늘지나 않은 것에 안도하게 된다.
가열차게 세웠던 서른아홉가지 연초 계획 중, 지금 두세 개만 하고 있어도 선방이건만 해낸 것에 대한 칭찬보다는 못해낸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 게을렀던 나를 탓하게 된다.
이미 넘길 달력보다 넘겨진 달력 페이지가 확연히 많아지는 그 계절, 가을이 온 것이다.
다른 계절들은 그 시작에 설렘이 있다.
새싹이 땅을 차고 나오며 생기가 돋는 봄.
녹음이 푸르러지면 너나 할 것 없이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방학을 기다리는 여름.
첫눈이 오길 모두가 기다리는 겨울.
그러나 은행향을 타고 오는 가을은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다. 억울할만도 하다.
가을이 입은 색깔과 특유의 느낌이 좋기도 하지만, 이미 흘러간 올해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해 묘한 느낌이 든다. 같은 커피 향도 다르게 느껴지고, 늘 걷던 거리가 감성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계절.
생각해보면
전 남친들과 헤어짐을 선택하고 펑펑 울었던 것도 대부분 가을이었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며 우울증 증상이 있었던 계절도 가을이었다. 이유없이 우는 아기를 안고 창밖을 보며 오후 네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때가 있었는데 그 아픔이 주는 슬픔의 성격과 크기가 달랐음에도, 내 눈물의 이유중 팔할이 "가을" 때문이라 탓했다.
가을을 참 좋아하지만, 어딘가 감정적으로 힘들게 느껴지기도 해서 지금 처럼 잔잔한 호수같은 생활이 아닐 때는 가을이 오는 게 덜컥 겁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을이 소리도 없이 훌쩍 지나버리면 그 시간이 떠난게 어찌나 아쉽고 서운한지...
오는 가을 막지말고, 가는 가을 잡지말자. 온전히 이 가을을 즐기고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