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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아이에미 Nov 03. 2024

쫌, 알아서 먹고 갈래?

삼시세끼가 light 할 수 있어?

아이를 낳고 기르기 시작한 이후부터 드라마, 영화랑 담을 쌓고 산다. 한 우물만 파는 성향이라 몰입하게 되면 그 외의 남은 생활들이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삐그덕 거리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엔 취향저격 드라마를 본방, 재방, 삼방도 보며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듯 감정이입 하곤 했다. 주인공의 명대사를 따라 읊기도 하고, 울었던 장면이 나오면 미리 감정 끌어올려 함께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왜 저래"라며 한심해하는 식구들의 반응 따윈 알 게 뭐야. 나 지금 진지하다고.


그랬던 여자는 이제 죽었다.

엄밀히 말해 감정이 죽었다. 더 상세히는 드라마나 영화에 투자할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영화 같은', 조금 소박하게 '드은' 결혼생활을 꿈꿨던 철 모르던 아가씨는 '다큐'혹은 '스릴러'에 가까워진 결혼생활을 견디는 돌부처 아줌마가 되었다.


시부모님과 집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 지방출장이 신랑과 이불 덮은  한 달도 되지 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있으니 서둘러 아이를 가져야 한다며 고려짝 같은 친정엄마의 성화에 한약을 드링킹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시어머니가 그러셨으면 각골난망했을 터.

밖에 없는 소중한 신혼생활은 그렇게 건너갔다.




그리고 모든 게 처음인 새내기 엄마로 다시 태어났다. 임신으로 변화하는 몸의 작은 시그널 하나에도 예민하기 그지없었고, 지금도 임신출산 서적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와 <삐뽀삐뽀 119>를 탐독하며 아이를 키웠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라더니, 순 뻥이지 싶었다.

애를 낳고 나니 그냥 아팠다. 아물지 않은 뼈 마디마디가 아팠고, 이유 없이 우는 갓난쟁이를 달래도 소용없을 땐 패배감마저 들어 마음이 끝도 모르고 가라앉았다. 얼굴이 벌게져라 우는 애를 싸매고 헐레벌떡 소아과에 가서 "아기가 이유 없이 자꾸 울어요, 어디가 아픈 걸까요?"라고 하니 의사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었지. 애는 원래 울어요.


그런 애를 키우며 같이 눈물 지었으니,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드라마의 비련의 여주인공 나야 나.

젊은 시절 왜 그리 드라마에 빠져 감정을 소모했을까 되짚어보니, 사회생활에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낼 해방창구가 필요해서였구나. 드라마 덕후인 줄만 알았는데, 나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렇게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쪽대본도 없는 리얼 라이브 드라마를 24시간 내찍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갈 무렵, 잠든 아이를 숨죽여 내려놓고 뒷걸음질 쳐 거실로 나오니 남편이 요즘 새로 시작한 예능프로그램인데 재밌다며 <삼시세끼>를 소개한다.

너 이 새키, 재밌는걸 혼자 보고 있었구나.




아기의 배냇짓을 볼 때 외엔 입꼬리가 늘 여덟 팔(八) 자를 그리고 있었기에 나에게도 웃음이 필요했다. 어지간하면 웃지 않는 남편이 재미를 보증했으니 소중한 잠을 팔아 웃음을 얻고 주름살 좀 펴보리라. 예능은 한 회 못 봤다고, 잠깐 칭얼대는 애 달래다 몇 장면 놓쳤다고 흐름파악이 안 되는 드라마랑은 결이 다르기에 인생극장을 찍느라 지친 초짜 엄마에겐 더할 나위 없는 해방창구였다.


‘깔깔거리며 웃진 못해도 지친 직장인들이 맥주 한잔 마시며 편안히 시청하다 잠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삼시세끼>를 기획했다는 나영석 PD. 당신은 지친 직장인뿐 아니라 육아에 찌든 신입 엄마에게도 그저 빛이었습니다. 수려한 자연풍경에 BGM을 깔고 슬로를 걸어 메말라가는 감성을 촉촉 적셔주셨고, 요린이(요리초보라는 뜻)에게 차승원의 손을 빌어 툭툭 튀어나오는 간단하지만 맛깔난 레시피를 하사하시어 '야 너'를 외칠 용기를 주셨습니다. 아멘.


그렇게 <삼시세끼>정선 편, 어촌 편 등의 시리즈를 시즌1, 시즌2라는 부제를 붙여가며 꾸준히 에피소드를 쏟아냈고, 덕분에 웃음 한 스푼 더해진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9월 <삼시세끼> 10주년 스페셜 에디션인 <삼시세끼 light>가 방송을 시작했다.


<삼시세끼>가 10년이나 되었다고? 남편이 놀라워한다. 야 이 새키야. <삼시세끼>만 10년 됐고, 차승원과 유해진이 호흡을 맞춘 게 10년인데 아직도 안 맞고 투닥대는 게 놀랍냐. 우리 새끼도 10살이 넘었고, 너님과 한집 산 게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안 맞는 게 더 놀라운 거 아니냐. 웃는 얼굴에 시원하게 침 한 번 뱉어준다.




그나저나 최애 힐링예능을 보면서 제목 옆 'light'라는 단어가 자꾸 눈엣 가시처럼 거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첫 화부터 능숙 혹은 능글맞게 협상을 했음에도 여전히 까다로운 반입 금지 품목과 무게 제한 규정에 한 번 갸우뚱,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에서 차승원이 처음  김치 담그기였기 때문이리라. 주부 타이틀을 단 지 10년이 훌쩍 넘어도 여전히 어려운 그 김치 담그기를 정말 라이트 하게도 해내시더라. 리스펙.


가뿐하게 음식을 해내는 차승원을 보며,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남편에게 한 마디 건네본다.


"엄청 쉬워 보이는데,
한 번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어?"

"아니, 엄청 쉬워 보이니까 네가 해주면 되잖아"


뭬야? 10여 년의 내공이 쌓여 가까스로 요린이는 면한 나에게 이 남자는 너무도 당당하게 요리주문을 한다.


여유로운 음악과 함께 치열보단 우아에 가까운 모습으로 편집되어 보이는 그럴싸한 장면. 뜨거운 열기에 흐르는 땀방울마저도 슬로를 걸어버리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좁은 주방에서 아차 하는 사이 끝을 베어 먹고, 뜨거운 열기에 손목이 벌게지거나 나쁘면 타탁 튀어 오른 기름에 손을 튀겨먹으며 전쟁과도 같이 음식을 하는 마누라는 쳐다본 적이 없으니 저러지. 앓느니 죽지.

Image by Abdulmajeed Hassan from Pixabay




주말이면 늦으막이 일어났다 다시금 드러눕기에 '저 몸뚱이에 들은 전지는 충전이 되긴 하나'싶다가도 토끼 같은 자식들과 마누라 두고 골프 치러 갈 때는 에너자이저가 따로 없더라. 화려한 싱글 마냥 홀가분하게 나가는 사람이 왜 이리 부럽던지. 주말이 되어도 쉼은 커녕 더 빡센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 날씨는 흐림이다.


퇴근도 휴일도 없는 전업맘의 삶이 부칠 때가 있다. 남편이 전방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는 전사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까리 노릇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 있거늘.


"애들 다 등원, 등교하고 나 출근하면
쉬면 되는 거 아냐?"
라는 뇌 없는 소리를 잘도 한다.

"정 힘들면 네가 나가 돈 벌어와, 내가 집에 있을게"


('살림할게'라고도 안 한다. 집 지키는 개 취급 같아 기분이 개 같아진다. 으르렁)라는 말은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들먹이는 치졸한 단골 레퍼토리. 요린이도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한다의 준말)도 아닌 그냥 먹는 것만 진심이지 요리는 알고 싶지도 않다는 사람이? 뭐라 쳐 씨부리쌌노.


그에겐 쉬는 게 당연한 주말, 나름대로 치열하게 주 5일 살림을 사느라 기력이 달려진 아줌마는 브런치라는 이름으로 애매한 시간에 계획된 한 끼 식사를 차려내고 묵묵히 치워낸다. 은근슬쩍 점심을 건너뛸 요량은 남편의 '꺽-'하는 우렁찬 트림소리와 함께 맥없이 사라진다.


"간. 단. 히. 뭐. 라. 도. 먹. 자."


간단한 건 뭐고, 뭐라도는 또 뭐란 말이냐. 요리에 간단한 게 있긴 한 거야? 그렇게 간단한 거면 너님이 한 번이라도 좀 해주면 안 될까? 주말에 입맛도 각기 다른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차려내다 보면, 삼시세끼란 단어 뒤에 light라는 단어는 결코 올 수 없는 말이지 싶다.


 쫌, 알아서 먹고 갈래?


(간단히 뭐라도) 쫌, 알아서 먹고

(어디라도 좋으니) 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줄래?


Image by Aditya Saxena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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