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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아이에미 Nov 28. 2024

눈사람 킬러가 돌아왔다

미안해요, 동네 사람들.

밤 사이 2024년 첫눈이 내렸다. 발목까지 소복이 쌓인 눈을 보다 문득 지난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려 마트 배달이 안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한창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젠 냉장고 뜯어먹기를 하지 않는 한 먹을만한 게 없었다. 에브리데이의 가장 빠른 배송이 막히고, 비마트마저 날 배신했던 그날. 어쩔 수 없이 마트 사냥을 하러 나설 채비를 하는데 작은 아이가 함께 가자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평소라면 산책 삼아 같이 갔겠지만, 끄러운 눈길에 장 본 물건들을 낑낑대며 들고 와야 하기에 여력이 안될 것 같았다. 아이에게 화를 낼게 불 보듯 뻔했다. 진창이 된 눈길에서 뛰다 넘어지거나 엉금엉금 기어 오는 자동차와 부딪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되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리라.


감사하게도 아이의 할아버지께서 서둘러 투를 걸치시더니 집 앞에서 손주와 놀아주겠노라 하셨다. 집 강아지보다 말을 잘 안 듣는 게 살짝 걱정됐지만, 내 코가 석자이니 서둘러 마트로 향했다. 방구석에 앉아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집 앞까지 주문한 물건을 배달받는 문명을 누리다 오래간만에 많은 인파를 헤치고 직접 물건을 이고 지고 오니 현관 앞에 도착할 무렵엔 체력이 바닥났다.


어떻게 저녁을 해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째 저째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고 아이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잠이 들기 전까지 아이와 부둥부둥 스킨십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는 그 길지 않은 시간, 육아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까 엄마 마트에 장 보러 간 동안, 할아버지랑 재밌게 놀았어?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네?"
"응, 재밌었어. 할아버지한테 눈도 던지고, 눈사람도 놀았어. 장갑이 젖어서 들어왔어."



나이에 비해 제법 말을 조리 있게 하는 편인 아이가 다시 생각해도 재밌는지 킥킥대며 대답한다.


"우와, 할아버지랑 눈사람 만들고 놀았어?"
"아니, 눈사람 뿌시고 놀았어.
집 앞에 눈사람이 커~다란게 있었는데
내가 만지니까 뿌서졌어."


응? 눈사람을 만들고 논게 아니고 부수고 놀았다니! 공감능력 충만한 에미가 그 현장에 있었으면 '누군가가 정성껏 만들어 둔 눈사람을 해치다니 아니 된다'며 손목을 잡았을 터. 그렇게 아이는 눈사람 킬러가 되었다.




뜨거운 여름이 끝나고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는 겨울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을. 놀이터에서 뛰놀기 좋던 날씨가 하루아침에 추워져 겨울외투를 꺼낸 날, 드디어 눈이 오냐며 신나 했더랬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던 그날이 온 것이었다. 아이의 발목 정도 높이로 소복소복 쌓여 놀기 딱 좋고, 눈 뭉치기 딱 좋은 완벽한 습도와 재질의 최상급 첫눈이라니. , 늘도 놀이터 무사통과는 글구나.


유독 추위에 약해 7겹의 내복을 낑낑대며 껴입고 흡사 미쉐린타이어 캐릭터 같은 형상으로 교에 다니던 린이가 어느새 엄마가 되어 자발적으로 제 아이와 눈 놀이할 결심을 하다니. 나 자신, 칭찬해. 뜨거운 모성 덕인지 두툼해진 지방층 덕인지 예전보단 추위를 덜 타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기름칠이 시급한 로봇처럼 삐그덕 대는 몸뚱이에 미끄러운 길이 두려워진 아줌마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어린이를 소환해 본다. 오라, 빙판길을 향해 우다다 달려서 스케이트 타듯 촥 미끄러지 놀던 어린이여. 오라, 넘어져도 재밌기만 했던 관절 팔팔하고 운동신경 좋았던 그 시절의 나여. 장갑과 모자, 방한화로 중무장하고 현관문을 나서며 기도해 본다. 오늘 하루 허리와 무릎이 무사하기를.


유치원을 향해 가는 길. 아이는 한 발짝 떼며 화단의 눈 한 번, 또 한 발짝 떼며 자동차 보닛 위의 눈 한번 쓸어 담아 조막만 한 손으로 눈을 꼭꼭 뭉쳐본다. 아직 힘 조절이 미숙해 뭉쳐지는 듯하다 뭉개져 퍼스러지고 만다. 사실 우리 아이로 말할 거 같으면 어린이집 다니던 상꼬맹이 시절, 가의 이름 모를 잡초가 예쁘다며 꽃을 따려다 실수로. 그만. 아차하고 뿌리째 뽑아 당황하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손아귀 힘이 남다른 아이는 눈뭉치를 만들지 못하는 게 속상해 입을 삐죽 대다 화단 구석 은둔하고 있던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 적당한 힘을 주어 황금밸런스의 각기 다른 크기의 눈뭉치 2 만들고, 일정시간 적당한 압력을 가해 접합해야만 실패 없이 만들 수 있는 물리학과 조형학의 결정체. 눈. 사. 람.


"우와- 눈사람이다. 누가 만들었지? 이쁘다."


퍼석. 파스스스-.

들어 올리자마자 눈사람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 아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 그냥 눈으로만 보자. 이 눈사람 만든 사람이 망가진 눈사람을 보면 속상할 거 같아."

"한 번만요, 이번엔 살살 만져볼게요."


아... 미안해요, 동네 사람들.

차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성심 만들었을 눈사람인데 저희 아이 손길이 닿기만 하면 바로 사라지네요.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그런 거지, 진짜 일부러는 아니에요.

내년 다시 돌아오는 겨울이면 아마도 이 구역 눈사람 킬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그날이 오면 한때 눈사람 킬러였던 아이와 함께 그동안 무수히 사그라진 눈사람을 기리 최선을 다해 눈사람을 산해 볼게요. 그때까지 부디 우리 동네 눈사람 실종사건은 눈감아주시기를.


Image by Stephan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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