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터울이 제법 나는 남매를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 비루해 보이기도 한 이게 나의 메인타이틀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 자신에게 돈 쓰기 쉽지 않은데, 슬초 브런치 강의를 들은 건 올해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지 싶다.이렇게 브런치 안에 나의 대나무 숲도 갖게 되었고, 아직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지언정 아마추어 작가라는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는 묘한 성취감까지. 그리고 이제 어찌 살고 있나 알 길이 요원한 대학동기와 조리원동기들 대신 공통관심사를 가진 한 명 한 명 어메이징한 든든한 동기들이 생겼으니 말이다.
큰맘 먹고 우물 밖으로 나간 들, 좁디좁은 내 인맥과 생활반경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기 단톡방을 벽 타기 하며 매일 감탄하기 바쁘다. 육아, 교육, 글쓰기 등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동기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엄지 척 혹은 하트 스티커로 대신하며 단톡방에 숨죽여 있는 자신이 마치 영화 기생충 속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일원처럼 느껴진다.
이 인연의 끈을 놓칠세라 그리고 책 읽기를 꾸준히 해나가고 싶은 마음에 독서모임에 들어갔다. 하필 첫 모임이 큰 아이 돌잔치 이후 10년 만에 친척 총동원령이 내려진 사촌의 결혼식날이랑 딱 겹쳤다. 부모님께 축의금만 보내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가 아이들까지 주렁주렁 다 데리고 오라셔서 졸지에 민폐하객 역할을 맡게 되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첫 모임의 후기가 사진과 함께 단톡방에 올라왔다. 손수 만든 케이크와 빵, 아로마향까지 함께 나누고 싶은 것들을 챙겨 오셔서 어색할 새가 없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단다.이런 오프라인 모임은 처음이라 책만 챙겨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편으론 첫 모임에 못 간 게 다행인가 싶은 못난 생각까지 들었다. 뭐랄까, 집들이에 가는데 호스트의 '빈손으로 오라'는 말에 진짜 빈손으로 갔더니 일행 중 혼자만 빈손일 때의 기분이랄까.
쨌든, 다음 모임부턴 책도 열심히 읽고 꼭 가겠노라 마음먹었는데 매월 모임 때마다 날짜 잡기 번거로우니 둘째 주 토요일로 잡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고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둘째 주 토요일은 독서모임이라고 우선순위 둘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지 싶었다. 바로 중환자처럼 침대에 누워 손하나 까딱 안 하고 핸드폰으로 영화감상 중인 남편에게 달려갔다.
나: 독서모임을 매주 둘째 주 토요일로 정하자는데, 나 나가도 돼?
남편: 나 골프모임이 둘째 주 아니면 셋째 주 토요일인데?
나: 셋째 주로 하자고 하면 안 돼? 나 독서모임 나가고 싶은데.
남편: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스케줄 보며 잡는 거라.(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이 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순간 날개가 콱 꺾이는 느낌이었다. 남편의 골프모임은 친목을 기반으로 한 카르텔 성격을 띠고 있어서 놀러 간다고 마냥 구시렁댈 수도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조금 불편하고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말이라도 해본다고 답해줬다면 물론 결과는 내가 주저앉아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을지언정 이런 추락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답정너 대화를 끝내고 나니 내 주제에 무슨 글쓰기고 책 읽기냐 싶어 일주일 넘도록 브런치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브런치가 글 좀 쓰라며 알림을 보내와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읽고 쓰기 시작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지만 그간 쏟은 내 에너지와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 모니터 보고 키보드 두드릴 시간에 내 새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등이나 토닥여주자.
나라는 인간이 책을 읽던 글을 쓰던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은 잘도 흘렀다. 방 한편에는 읽고 싶어 빌려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이 탑처럼 쌓여있는데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동기 중 한 분은 출간 계약한 책을 탈고했고, 몇몇 분들은 조회수 1만 뷰를 넘기거나 요즘 뜨는 브런치북 1위를 찍고, 메인화면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크리에이터 배지를 단 분들도 생겨났다. 역시 가만히 있으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구나. 다들 자녀를 키우고, 집안일도 하고 하물며 일도 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렇게 방구석에 맥없이 있는 내가 썩은 메주덩어리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와중에 이곳저곳 거처를 옮기며 장사를 하시는 시부모님도 컴백하셨다. 그리곤 당신네가 지방에서 달방살이 할 때 내내 덮던 이불을 빨아놓았냐며 당연하게도 물으신다. 시아버지께서 가져다만 두셨지 일언반구 없던 이불짐이었다. '빨아놔야지 이대로 두면 안된다.'이 말 한마디 하시곤 일을 보러 쌩하니 나가신다. 그렇게 며칠간 이불빨래와 늘어난 식구들 옷가지를 빠느라 세탁기도 내 손도 물기 마를 새없는 시간을 보냈다. 빨래 마르기가 무섭게 젖은 빨래를 널고, 뒤돌아서면 보이는 머리카락과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며 이게 나란 사람의 삶의 이유란 말인가 싶어 울컥했다.
열심히 해도 티 안나는 살림, 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 아직 뽀송하게 마르지도 않은 건조대의 옷들을 만지작거리며 또 세탁기 돌리라고 오더 넣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작은 아이 유치원 등원준비에 열을 올렸다. 탭북과 읽을 책, 충전기, 텀블러와 생수 한 병까지 에코백 가득 만두소 채우듯 꽉꽉 눌러 담고 어깨에 둘러맸다. 오늘은 기필코 글을 발행하겠노라. 비장한 각오로 아무도 모를 가출을 감행했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며느리. 버릴 수 없는 내 타이틀이지만 그게 내 존재의 이유이고 싶지는 않다. 돈을 벌면 좋지만, 돈을 벌지 않는다고 가치 없는 삶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왜 이리 글쓰기도 힘들고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고 느낄까, 더 바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던데."하고 딸아이에게 푸념을 하니 "우리 키우느라 시간이 부족한 거죠. 글쓰기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공부도 하고, 학부모회 활동도 하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F성향의 에미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건 어린 주제에 정신 번쩍 들게 하는 팩폭전문가 T성향 딸의 한 마디다.
고맙다, 집에서 논다고 안 해줘서. 방문 닫고 엄마는 거들떠도 안보는 줄 알았는데, 나름의 시선으로 엄마를 보고 있었구나. 고맙구나, 남편의 철벽에 또 와르르 무너진 자존감과 꺾여버린 날개가 아파 웅크리고 있는 엄마를 담담하게 너만의 방식으로 위로해 줘서. 네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또 그저 그렇게 엄마로서의 삶만 살겠노라 주저앉았을 거야.
어쩌면 주변 환경이 내 날개를 꺾은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더 부딪히기 싫어 날개를 접어버린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딸아, 너는 주변 환경이 대차게 너를 들이받아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날개와 기개를 가진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구나. 여전히 미숙한 어른인 에미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단다.그래서 오늘 다시금 꼼질꼼질 글을 쓰며 당장 훌쩍 날아오르진 못해도 다가올 언젠가를 위해 버둥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