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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사로운 Dec 13. 2024

노량진 컵밥 말고 혼밥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들

당신의 첫 혼밥은 언제인가요?


 한참을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식당문을 열었다. 11시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겠지 했는데 웬걸. 벌써 세 테이블이나 앉아있다. 문을 밀었던 손을 다시 당겨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는 식당 안에서 혼자 앉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으며 갈 곳 잃은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긴장할 나의 모습을 마주 할 자신이 없어서 되돌아 나온 것이다.  혼자 먹느니 그냥 굶지 뭐. 혼자 밥을 먹는다고 외톨이가 된 것도, 혼자 밥 먹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는데. 타인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한 아직 어린 20대의 나였다.


유치원 퇴사 후 점심도시락을 챙겨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혼밥을 경험하게 되었다.(식당에서의 혼밥은 아직입니다만) 북적한 시간을 피해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 구석 자리를 차지한다. 지금이었으면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밥을 먹었을 텐데 그땐 폴더폰 시절, 교육 관련 잡지나 교직논술 읽기 자료를 무심히 읽으며 식사 겸 휴식 시간을 갖는다. 식후 종이컵에 타 먹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은 최고의 디저트. 

대학 3학년 겨울방학, 4학년이 되면 실습이다 졸업이다 바쁘니 임용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친구들을 따라 노량진에 발을 들였다. 1호선 노량진 역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 골목골목 크고 작은 간판들 사이에서 찾아 들어간 학원. 두꺼운 임용책과 재학생들을 향한 강사님의 애정 어린 수업도 생각이 나지만 강의 후 친구들이랑 노량진 골목 사이를 헤쳐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던 그때의 우리가 아련하다. 앳되고 싱그러운 우리가, 미래를 꿈꾸며 조잘대던 우리가, 희망을 품고 까르르 웃던 우리가. 

철판 닭갈비에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었던 골목 초입의 닭갈비집, 골목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다 먹어보았던 푸짐한 파전과 칼국수(그때 막걸리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한. 막걸리 맛은 여전히 모르지만), 간단히 요기하러 자주 들렀던 맥도널드까지. 노량진 뒷골목 사이사이 우리의 발자취들이 남아 있다.


엄마수험생이 되어 혼밥을 한다(이제야 비로소 식당 혼밥). 노량진에서.

대학생에서 엄마가 된 나만큼 노량진도 그때의 노량진이 아니다. 노량진역 앞의 육교가 사라졌다. 육교를 건널 때 김밥파시던 아주머니가 항상 같은 자리에 계셨었는데 거리의 노점상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익히 들어 본 노량진 컵밥거리도 기웃거려 본다. 포장마차의 깔끔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밥심으로 사는 엄마수험생에겐 성에 안 차는 메뉴라 흘깃 구경하는 걸로 만족한다.(뉴스에서 봤을 땐 수험생 손님들이 줄을 섰던데 내가 지나가는 날은 어쩐 일인지 한산하거나 문 닫은 가게가 많았다.) 그리고 한집 건너마다 보이는 저가 커피브랜드. 컵밥거리와 달리 각 브랜드마다 수험생들로 북적북적하다. 대기표를 받아 들고 내 번호가 찍히길 기다린다. 얼죽아가 아닌 나는 추운 겨울에도, 무더운 한 여름에도 따. 아.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고소한 향으로 수험생 모드를 켜주고, 후 불어 한 모금 마시며 아직 잠들어 있는 뇌를 다정하게 깨운다. 유모차 밀며 마시는, 집안일에 지쳐 마시는 커피와는 견줄 수 없는 호사스러움을 선사하는 고오급 커피다. 반쯤 남아있는 아메리카노에 뜨거운 정수기 물을 한번 보충하여 마시고 나면 오전 강의 끝, 점심시간이다.

엄마수험생 첫해에는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어보려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분 옆에 앉아 슬쩍 말도 붙여보고 밥도 같이 먹으며 나이 먹은 수험생의 외로움을 이겨내 보려고 애를 썼다. 한 해 두 해 넘어가다 보니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어색한 빈 틈을 메워가는 시간들에 에너지를 쏟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졌다. 노량진 엄마 수험생 3년 차에 비로소 온전히 혼자를 즐겨보기로 한다. 아이에 맞춰 메뉴를 정하고, 남편에게 주문과 결제를 맡기는 식사에서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음식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접 결제를 한다.

식당문을 열었을 때 빈자리가 없다면, 다른 가게의 문을 열 수 있는 나.
사람이 많아도 포기할 수 없는 메뉴라면 식당 앞 인파 속에서 줄을 설 수 있는 나.
친구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라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하는 나.
옆에 앞에 아무도 없어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재료의 신선도와 조화를 느끼며 맛있게 한 그릇 깨끗하게 비우는 나.
먹은 식기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의자를 쏙 집어넣고 일어서는 나.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건네며 계산하고 식당을 나서는 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 안에서  '나'를 만난다. 오롯이 혼자 먹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그 시간은 어딘가 헛헛하고 공허한 나를 채우는 약이 된다. 나를 안아주며 위로한다.


노량진에서의 혼밥. 그 혼밥이 있었기에 결혼, 출산, 육아로 휘몰아쳤던 30대에 아내, 엄마가 아닌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만남으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지금의 자리도 잘 지켜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곧 겨울방학이 다가온다. 두 아이 등교시키고  먹는 육아휴직자의  평일 점심 혼밥은 컵라면이나 즉석 카레, 남은 국에 말아먹는 밥, 것도 귀찮을 땐 쨈(슬초동기님들의 추천으로 클로티드 크림도 처음 맛본건 안 비밀) 바른 빵이다. 혼밥이 사라질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나를 채우고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혼밥의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아이들과 함께하는 돌밥도 즐길 수 있을 테니. 대충 때우는 한 끼가 아니라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 음미하며, 생각하며, 혼밥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리라.


컵라면이 아닌 파송송 계란탁 봉지라면 아니면 뜨겁게 데운 국과 밥, 접시에 가지런히 반찬을 담아. 진수성찬 아니어도 나의 마음과 시간을 오롯이 채워 줄 한 끼의 식사.

이렇게도 차려 먹어보고 싶네요=)
오늘, 따뜻한 혼밥 어떠세요?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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