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초등학생 티가 나는 둘째가 하교 길에 묻는다. "나의 하루"와 관련된 수업에서 엄마의 하루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물어보라고 하셨단다.
엄마? 이불속에서 유O브 큭큭큭 보면서 픽 잠들었다가 노랑믹스커피 한잔 때렸지 뭐. 양심상 로봇청소기님 불편하지 않게 바닥에 널린 것 소파로 올려드리고.
이런 날이 대부분이지만 다행히 이 날은 동주민센터에서 하는 우쿨렐레 강습을 다녀온 날.
"엄마 오늘 우쿨렐레 수업 다녀왔지. 에이마이나지코드 나오는 노래 배웠는데 손톱 밑이 이렇게 빨갛게 되도록 연습했잖아. 손가락이 생각대로 잘 안 움직이더라고. 봐 봐. 아프겠지?"
괜한 찔림에 말이 능구렁이처럼 길어지고 촉새처럼 빨라진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 몸 쓰는 육아가 끝나가는 걸 느끼고파서? 아니죠~
처음이자 마지막일 5살 터울의 두 아이가 한 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파서? 이것도 아니죠~
가족과 직장에 눈치 볼 일 없이 내밀 수 있는 카드, 육아휴직을당당하게 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이라 쓰고 자유시간이라 읽는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누군가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시간이생긴 것이다.(하루 24시간 중 평균 4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소중하쥬)
입학식과 적응기간을 거쳐 유치원은 재미있었는데 학교는 재미없어서 다니기 싫다는 아이를 살살 달래느라 3월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새 달 4월이 오기 전에 본격적으로 나만의 자유시간을 위한 작전을 짜보기로 한다.
월화수목금 초1의 등하교시간, 오후 학원시간을 꼼꼼히 적는다. 오호~수요일은 5교시에 방과 후수업까지 있네. 하교시간이 무려 2시 40분. 수요일은 우리 동네를 벗어날 수 있는 날로 확정.주 3회 오후 1시간 정도는 아이 학원수업 기다리며 카페에 갈 수 있겠다. 요일 별로 확보된 시간을 파악한 후엔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본다.
신년계획에 필수로 들어가는 운동과 영어공부는 빠질 수 없지. 올해는 책이랑도 더 친해지고 싶으니 도서관가기도 넣고. 학원수업 기다리는 동안 카페 가서 책을 보면 되겠다. 동주민센터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니 주민센터에서 우쿨렐레 강습도 한단다. 주 1회에 이렇게 실속 있는 강습료라니. 침대 위의 나무늘보도 이럴 때는 치타가 된다. 바로 전단지의 번호로 강사님께 연락드려 수강신청 완료.앗 그런데 우쿨렐레 강습날이 마침 수요일이네. 수요일은 포기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시작일을 좀 미루자.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지. 완벽해. 파워 J는 아니지만 발뒤꿈치는 따라가겠어.
계획을 세웠을 뿐인데 다 이룬 것 같은 뿌듯함이몰려온다. 시작이 반이라잖아. 다이어리는 쓱 밀어 넣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간다. 자유시간에 누릴 수 있는 이 여유와 빈둥거림은 달디 단 밤양갱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흘러 11월이 되었다.
아니 벌써.
엄마의 계획은 어찌 되었는고.
가장 기다렸던 수요일은 장거리 외출하는 날이었더랬지. 왕복 2시간 이상 거리의 전시회 관람 1회와 친정동네 친구들과의 브런치 2회로 장엄히 마감하였다. 면허증도 없는 뚜벅이에, 저질체력이 버텨주질 못한 것이다. 장거리 외출 후 오후 시간은 병든 닭마냥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니 이런이런. 문화생활이나 친구들과의 수다가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소가 되길 바랐던 나의 바람과는 너무 먼 결과를 가져와서 지속할 수 없었다.
영어공부는 레슨 3을 넘기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동기부여가 덜 된 탓인가. 쏼라쏼라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보지만 당장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불편함이 없으니 미루고 미루게 된다.
그렇다고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향형 I에 맞는 나만의 자유시간을 누리고 있다.
저질체력을 개선하기 위해서 주 2회 매트운동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 오전타임이 11시 50분부터 1시간이라 운동 다녀와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둘째를 데리러 가면 버리는 시간 없이 딱이다. 수강생도 3~4명이라 조용하고 집중도가 높다. 근력과 유연성이 꽝인 내 몸에 적당한 숨참과 개운함을 선사하는 매트운동. 이 운동으로 운동능력이 한 단계 상승하면 필라테스나 헬스 등에 도전해볼까 한다. (운동추천, 환영해요)
수요일마다 가는 우쿨렐레. 시작할 때만 해도 강습 후 매일 30분씩 연습하기가 목표였는데 육아휴직자의 삶에서 30분을 떼기가 상당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함을 느낀다. 빠른 태세전환으로 수업 가는 날 만이라도 집중해서 열심히 하는 것으로 마음을 비우니 압박감이 덜하다.
집에서 가까운 작은도서관도 틈틈이 가고 있다. 작은도서관이라 보고 싶은 책이 없을 때가 많은데 상호대차서비스라는 신세계가 나를 기다린다. 핸드폰을 열고 우리 구내 도서관에서 검색하여 신청만 하면 작은도서관으로 가져다주니 뚜벅이인 나에겐 선물과도 같은 서비스이다.
나의 작은 쉼터도 발견했다. 모네의 그림과 초록이가 많은 집 앞 작은 카페. 점심 직장인 손님이 많은 곳이라 11시 30분까지는 손님이 거의 없다. 나만의 서재인 양 커피 한잔, 마들렌 혹은 서비스로 가끔 주시는 쿠키 하나 놓고 책도 보고 핸드폰 검색도 하고 다이어리도 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공간이 되었다.
복직이 3개월 정도 남은 지금은 소소한 일상 루틴에 집중하고 있다. 외출과 지인들과의 잦은 약속은 대문자 I인 나에게 맞지 않음을 여름이 오기 전에 확실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초브런치 3기 도전은 신의 한 수였다. 뭔가 이루고 싶고, 해내고 싶은 욕구는 많지만 늘 실천과 지속이 어려운 나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기에. 매일 운동하고, 읽고, 쓰는 루틴이 체화되어 복직 후에도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슬초브런치가 있는 곳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