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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Oct 25. 2024

구축아파트 살만 합니데이

선덕여왕을 만나다

교육에 있어 독서에 대한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쉽지 않기에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오곤 한다. 독서교육방법에도 나름의 유행이 있는데, 큰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5~6년 전에는 ‘슬로리딩’이 인기였다. 말 그대로 천천히 조금씩 길게 함께 읽는 거다. 나도 한땐 패션에 민감한 여자였는데, 이젠 교육 트렌드를 쫓는 아줌마로 돌변했다 보니 유행에 맞춰 슬로리딩을 하는 건 의욕이 빵빵 넘치는 엄마로선 당연했다. 더욱이 첫째니까^^


초등 저학년 시기 엄마 말을 순수하게 잘 받아줬던 그때, 나는 큰 아이에게 슬로리딩을 같이 해보자 제안했다. 우리가 선택한 책은 비룡소에서 나온 새싹인물전 중 선덕여왕 편이었다. 큰 의미는 없었고 손에 잡히는 대로 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엄마인 나를 위해서다. 이런 위인전을 읽다 보면 많고 많은 위인들의 남다른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에 놀라고, 전혀 몰랐던 업적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른으로서 모르는 게 조금 부끄러울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나는 아이처럼 이걸 알고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우리는 책장을 펼치고 슬로리딩을 시작했다.


초반부터 시선을 사로잡은 이야기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선덕여왕의 똘똘함을 보여준 일화다. 나는 이 일화를 읽는 순간 너~무 놀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 놀랜 이유가 아마도 내가 키운 아이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나? 여왕은 다르구나^^ 그림 속의 모란꽃이 향기가 나지 않음을 벌과 나비가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근거로 들어서, 그 어린 나이에 설명을 하는 걸 보고 똑똑함은 이런 것이구나. 그렇게 이 장면은 아이의 머릿속만큼 내 머릿속에도 각인이 되었다. 뭣보다 40 평생 살면서 화투장 외에는 모란꽃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찐한 자줏빛의, 송이가 크고, 향이 나지 않는 꽃이라는 걸 제대로 알게 되었다.


슬로리딩은 그렇게 몇 권을 더하고서는 큰 아이의 책 읽기 습관을 잡아주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가 있었음에도 힘에 부친다는 핑계로, 나는 한번 제대로 읽어서 알고 있다는 핑계로 함께 하지 않았다. (아마 둘째 아이의 부실한 독서습관은 엄마의 부실한 노력 탓일 게다.) 그렇게 모란꽃은 자연스럽게 점점 잊혀갔다.


현재 나는 40년 된 구축아파트에 살고 있다. 예쁘게 관리하지 않은 구축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은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봄만 되면 라일락 향기에 취해 다. 잠시 멈추어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향기를 맡기도 했던 순간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않은 달콤한 선물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엔 향기가 아닌 큼직한 꽃송이가 나를 사로잡았다. 사과만큼 크고 탐스러운 송이가 군데군데 달려있고, 색은 세상 본 적 없는 진한 자줏빛의, 누가 봐도 곱다, 고와하는 꽃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꽃이 피기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순간 온몸에 전율이 왔다.

 혹시... 모란이세요? 모란이란 생각이 문득 들자 과거의 선덕여왕 일화는 불현듯 떠올랐고, 나는 확신에 찬 용기로 바로 꽃송이에 코를 댔다. 보통은 벌이 무서워 송이 근처도 못 가는데... 역시나 벌과 나비가 없잖아. 시대에 걸맞게 바로 스마트렌즈를 들이댔다. 빙고~ 모란이다!  나는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온 동네방네 알렸다. 요즘 어느 화단에 모란을 심겠냔 말이다. 이 귀한 것을 어디서 보겠냔 말이다. 나의 호들갑과 달리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럼에도 나는 신기한 보물을 찾은 것 마냥 기뻤다. 심봤다! 구축아파트가 주는 봄의 선물임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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