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릭 휘리릭. 인스타 위를 빠르게 움직이던 내 손가락이 순간 멈칫한다. 나의 재빠른 손가락을 낚아챈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옛 직장 동료이자 가장 친했고 좋아했던 동갑내기 친구. 사진 속 그녀는 결혼과 임신으로 그만둔 나의 직장을 똑같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여전히 멋지게 다니고 있었다. 사진에서의 날씬한 그녀는 마치 페르시안 고양이가 영역 표시를 하듯 유럽 여기저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성공한 부장님의 출장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부럽구먼. 쩝.
우연히 보게 된 친구의 사진에 죄 없는 옛 추억이 소환된다. 저 깊은 우물 속 무거운 돌에 줄로 꽁꽁 묶여 여간해서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나의 골동품 사진첩이 언제 그런 존재였냐는 듯 스스륵 열린다.
자. 오랜만에 어디 한 번 들여다볼까
사실 나의 인생은 그렇게 시원하게 잘 풀린 적이 없었다로 시작해 본다. 그리 가난한 세대도 아닌 80년대생이지만 하필 우리 집은 지지리 궁상 가난했다.(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아빠는 반성하시고, 엄마 사랑해요) 그렇다면 이 꽉 깨물고 공부해서 개천에서 용이 되는 성장 드라마가 쓰여져야 뭔가 그럴싸한데, 안타깝게도, 늘 2% 부족한 나는 열심히는 하였으나 적당히 열심히 공부해 적당한 지방 대학에 적당히 잘 모르는 학과를 졸업한 적당하게 예쁘장한 학생이었다. 여기서 '적당히 예쁘장한'이라는 단어에 우~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상당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당히'란 말이 이 글에서는 그렇게 긍정적인 단어는 아님을 알린다. 나의 에피소드로 이 단어를 설명하자면 나는 대학 시절 교내 홍보 모델이었으나 한 번도 카탈로그 메인에 실려 본 적은 없다. 이미 상당히 예쁘장한 친구들이 내 앞으로 줄을 서 있었으므로. 나의 역할은 지나가는 학생 3 정도. 이것이 나의 적당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 난 수영 인생 5년 차 연수반 물개다. 그냥 물개 아니고 적당히 못하는 꼴찌 물개. 어찌어찌 열심히 해서(난 최선을 다한것이다)간신히 연수반에 발을 들이밀었지만 그게 다다. 난 2년째 제일 뒤 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적당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그 쯤 어디가 항상 나의 자리다.
흠흠. 다시 과거로 돌아오자면.
항상 2% 어설픈 나의 인생은 취업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랬겠지만 수십 번의 ‘안타깝게도 이번 채용 과정에서’를 거쳐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구간을 지나 통곡의 전화 “엄마. 나 드디어 됐어”를 시전 하며 어렵게 입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지나간다면 어설픈 나의 인생이 아니지. 어렵게 승무원으로 합격했지만 회사는 갑자기 흔히 말하는 '지상직'으로 출근하란다. 이건 뭐지.(15년 전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만큼 덜 빡빡한 세상이었다고 해야겠지) 이 세상이 나 편하라고 존재하는 세상은 아니지만 참 너무하게 어설픈 인생이었다. 몇 번의 휴학과 긴 취준생 시절로 이미 만학도인 내가 선택할 할 수 있는 직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무후무. 그렇게 등 떠밀리듯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 나를 돌아보자면. 글쎄. 출근하는 발걸음은 돌 같이 무거웠고, 해야 하는 일들은 산더미 같아 보였으며, 실수할까 안절부절 늘 노심초사했고,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지만 집에 와서도 두고 온 일 걱정에 마음을 놓지 못하는 까칠하고 예민한 간헐적 분노 조절(일명 분노조절장애)을 안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7년을 일했지만 2555일 동안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은 없었다.
당시 하늘에 돈을 뿌려대며 서울, 부산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던 나는 이 정도의 스트레스면 청첩장을 핑계로 사직서도 슬그머니 함께 동봉하여 팀장님 책상에 두고 내뺄 수도 있었지만 또 자존심 하나는 얄궂어서 굳이 주말부부까지 하며 1년 여를 더 버텼다. 누가 계속 다니라고 한 적은 없지만 내 안의 자존심과 싸워 견딘 직장 생활은 아이가 찾아오며 자연스레 나의 K.O 패로 마무리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흑백필름을 덮고 다시 현란한 인스타 사진으로 돌아온다.
다시 봐도 멋지군. 역시 될만한 녀석이었어. 엄지 척.
하지만 굳이 안부 디엠은 날리지 않는다. 안녕하다는 안부는 사진으로 확인했으니 쿨하게 여기까지. ‘좋아요’ 하나면 나도 그녀에게 생존 신고를 한 셈이니 굳이 구구절절 '잘 지내' '남편은' '아이도' 란 말로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럴 체력 있으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빨래나 한 장 더 개키지. 같은 고통을 공유하며 밤새 싫은 선배와 진상 손님 이야기로 소주 한 잔에 긴 밤을 갈아 넣었던 동료들은 이제 없다. 누구는 이미 나처럼 가정주부가 되어서 떠났거나 또 누구는 그녀처럼 바쁜 자리에 올라 일할 시간도 모자라거나. 소주 한 잔으로는 이제 어색한 공기의 흐름을 멈출 수 없지 않을까. 이제 그녀와 나는 엄연히 다른 세계 사람이다. 그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일도 하며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까. 지금의 당당한 그녀가 되기까지 내가 모르는 눈물이 넘치도록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 또한 아이 둘 뒤에 업고 앞에 매며 언덕길을 오르는 그때 나의 눈물을 모를 테니. 비겼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세계에서 아등바등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
그렇다고 지금의 나의 모습이 그녀에 비해 그리 초라하지는 않다. 인간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나의 철없는 장점. 무한긍정의 힘이 여기에서 발휘된다. 눈을 뜨면 징그럽게 예쁜 아이들과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발 디딜 틈 없는 거실, 그리고 커피 한 잔 놓기 힘든 책상인지 식탁인지 정체를 잃은 사각 테이블까지—이 모든 일상을 마주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긴장하거나 화가 치솟지는 않는다. 나의 현재 직장은 나에게 딱이다. 우린 서로 다를 뿐이지 맞다 아니다는 없다. 난 지금의 유쾌한 주부 은선씨가 좋다.
사진 한 장으로 멀리까지 왔다. 그녀 덕분에 풋풋했던 나의 옛 모습도 들춰보고 오랜만에 아빠 험담도 하고 나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마 간간히 전해지는 그녀의 사진으로 난 또다시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여행의 시간은 오늘보다는 좀 더 짧아질 것이고 여행의 횟수와 시간은 반비례할 것이며 언젠가는 그녀의 사진을 봐도 무덤덤히 웃으며 ‘좋아요’ 하나로 끝날 것을 나는 안다.